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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다시 읽는 오이디푸스
학이사:다시 읽는 오이디푸스
  • 박찬부 경북대
  • 승인 2004.03.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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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서사가 불가능해지고 모든 것이 해체되고 파편화된 '포스트모던 상황' 하에서 한편의 고전이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단순히 세월의 무게 탓만은 아니리라.
인류에게 2천4백여년 동안 큰 감동과 충격을 안겨 준 '오이디푸스 왕'을 쓴 소포클레스는 기원전 4∼5백년 경에 시인이며 군인으로서 그리스의 시대 상황을 온 몸으로 살아갔던 아테네의 한 시민이었다. 그의 이 한 편의 극시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이처럼 인류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그것이 담고 있는 어떤 '원형적' 성격과 중요한 관련성이 있을 것이다.

그 원형성을 나는 운명론적 질서론과 관련시켜 생각해 본다. 라이오스 왕과 이오카스테 왕비의 아들로 태어난 오이디푸스에게는 가공할 신탁의 예언을 피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과 수단이 동원된다. 결과적으로 그러나 이 도피의 과정이 정확하게 그 신탁을 실천하는 과정이었다는 데에 이 극의 비극성과 운명론적 역설이 자리하고 있다. 악의 근원으로부터 도망치는 행위 자체가 그 도피의 원인을 실행으로 옮기고 있다는 역설이다.

우리는 이 운명론적 역설을 '강요된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악을 피하기 위해 그에게 주어진 선택의 길은 곧 악을 실천하는 길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선택은 곧 강요된 선택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이미, 항상' 운명론적으로 점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극이 갖는 원형적 비극성에 주목하고 프로이트는 그것에 바탕해 그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을 세웠다. 그는 임상 경험이나 자기 분석을 통해 드러난 '가족 로맨스'의 현상이 이미 기원전에 씌어진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정확하게 극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크게 놀랐다. 그래서 그는 무의식의 발견자는 자신이 아니라 이미 앞서간 시인들이었다고 선언하고 정신분석학이 문학의 무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면 문학은 정신분석학의 무의식이다라는 명제를 세우기에 이른다.

프로이트에 이어 라캉은 오이디푸스에게 무의식적으로 가해지는 불가항력적 초월적 힘과 관련해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문화 상태로, 존재 차원에서 의미 차원으로 이행해가는 언어적 상징화 과정에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정언 명령과 같은 강요된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이 드라마를 읽었다. '사물의 타살'인 상징화가 완성된 후 인간 주체에게 남는 것은 신탁이 실현되고 자신이 범법자임을 확인한 후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외치는 오이디푸스의 처절한 환경과 비견된다. 이 죽음의 사막 위에서 새로운 생명 부활의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대목은 이 비극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 나온다. 여기서 언어와 욕망, 죽음과 승화의 문제가 밀도있게 전개된다. 죽음 본능으로서 욕망의 추구가 일반 대상을 유사 이전의 대타자인 물 자체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숭고한 작업과 연결되고 여기서 숭엄의 미학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이 기원전 몇 백년에 씌어진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현대의 정신분석학적 두 대부 프로이트와 라캉과 같이 읽으면서 나는 이미 또 다른 오이디푸스, 현대판 오이디푸스가 돼 그가 2천4백여년 전에 전범적으로 보여줬던 삶의 전철을 정확하게 되밟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극성을 피하려는 노력 자체가 그 비극성의 실천과 완성으로 연결된다면 누가 그 비극성을 피해갈 수 있겠는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오이디푸스나 그의 딸 안티고네와 같이 그 비극성을 처절하게 껴안고 온몸으로 죽음에 맞서는 것만이 죽음 본능이 지향하는 승화의 길을 가는 것이고 그것이 어렴풋이 열어 보여주는 숭고의 미학과 만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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