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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깊은 생각 66
짧은 글 깊은 생각 66
  • 교수신문
  • 승인 2001.04.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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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4-06 10:22:39
학기말 성적을 학교에 제출하면서 ‘과연 교수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학교가 교수라는 직업의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몹시 우울하게 생각해야 했던 일이 있었다. 교수의 강의평가를 시작한 몇 년 전부터 많은 대학에서 교수가 A, B, C 등 성적을 줄 수 있는 인원을 수강인원에 맞게 학교에서 정해 놓고 성적처리를 컴퓨터를 통하도록 의무화하여 학교가 정해준 인원을 맞추지 않으면 자동으로 성적을 제출할 수 없도록 제도화하였다.
필자는 지난 학기 전공필수 과목 강의에서 4번의 시험을 거쳤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중요한 필수과목이었으므로 결석없이 열심히 강의에 참석하여 학기말에 성적을 내고 보니 성적이 우수한 동점학생들이 많았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 조절해도 학교에서 정해준 인원을 초과하여 A를 주고 B를 2명 덜 주는 방법밖에 없어 교무처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하였으나 절대 안된다는 대답과 함께 수업태도라도 고려해서 처리하라는 훈계까지 받았다. 학생의 성적처리는 교수의 고유권한이라고 맞서자 ‘제시간에 처리하지 않으시면 교수님이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는 짤막하고 무시하는 듯한 대답을 돌려받았다. 결국 무작위로 A와 B로 나누어 성적을 처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일을 겪으며 필자는 대학사회에서 교수의 위치를 극명하게 느낄 수 있었고 꽤 오랫동안 내가 왜 교수가 되었는지 자괴감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교수가 자신이 가르친 과목의 성적조차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 이러한 행정편의주의 이면에는 교수에 관한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 직선적으로 표현하면, 강의평가가 실시되어 교수가 학생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무조건 성적을 잘 줄 수 있으니 교수가 하는 성적평가를 믿을 수 없고, 미연에 이런 일을 방지하고자 학교측에서 친절하게(?) 성적처리 기준을 정해놓고 교수는 단지 학교의 행정 처리를 신속히 도와주도록 때맞추어 컴퓨터에 입력이나 하라는 것이다.
우리사회 최고의 지성이라는 교수의 양식과 자율성을 믿지 못해서 나온 발상인데 이러한 제도를 만들어야 하는 요즈음 한국 대학의 현실이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교수가 자신이 가르친 강의의 성적도 자신의 소신대로 처리할 자율권조차 갖지 못한 사회에서 어떻게 학생들에게 자율을 가르치고 그 누구에게 자율성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인가. 한국교육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규제와 규율을 통해 자율성 있는 인간을 길러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율이란 책임과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으므로 결국 시키는대로 따르면 그만이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태도를 교육과정을 통해 조장해 왔고, 그도 모자라 규제를 교사로, 최근에는 교수에게까지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성적처리 뿐이랴. 교수가 연구 안할까 염려하여 정해진 기간동안 써야할 논문수에 이르기까지 최근에 경쟁력이라는 이름하에 대학에서 시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규제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믿지 못할 사람들을 왜 교수로 뽑았는지 안타깝기까지 하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그토록 열망하며 그 많은 규제의 최고 목표로 설정해 놓은 세계적 경쟁력을 실제 가지고 있는 학교에는 절대 이런 규제가 없다는 것이다. 필자 자신이 미국의 명문이라는 아이비리그 대학 중 하나에서 공부했지만 교수에게는 성적, 연구 등 무엇에서든 엄청난 자율이 부여되고 교수는 그 자율에 대해 성실히 책임지는 것만을 보았을 뿐이다. 과연 대학교수들의 자존심과 책임감을 무너뜨리는 여러 가지 규제들에서 한국 대학의 진정한 경쟁력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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