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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물사회
속물사회
  • 김누리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04.03.15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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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한국사회는 속물사회다. 속물들이 넘쳐나고, 속물들이 지배한다. 속물들의 문화가 ‘주류문화’로 행세하고, 속물들의 의식이 ‘건전한 상식’으로 통한다. 그리하여 급기야 속물들의 세계는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동경의 영역이 되기에 이르렀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속물은 세 가지 부류다. 첫째는 권력속물이다. 이들은 권력의 양으로 인간을 판단하고 응대한다. 약자에겐 철저하게 군림하고, 강자에겐 처절하게 복종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가 이들이 즐겨 외치는 구호이다. 아래로는 짓밟고 위로는 우러러보는 ‘사이클리스트형 인간’이 그들이다. 이들은 주로 정치계, 법조계, 언론계 등 ‘권부’에 폭넓게 서식하고 있지만, 일상의 삶에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학교에 만연한 ‘왕따 현상’과 권위주의적 교육방식, 가정과 직장에서 상습화된 여성차별과 성폭력은 권력속물들이 일상에 남긴 상처다.  

둘째는 자본속물이다. 이들에겐 재력이 인간평가의 기준이고, 일확천금이 일생일대의 목표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도 된다는 것이 이들의 인생관이다. ‘부자되세요’가 이들의 인사이고,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자’가 이들의 좌우명이다. 외국인 노동자를 노예처럼 착취하는 공장주들, 태국으로 필리핀으로 섹스관광, 보신관광을 떠나는 남정네들, 부모의 재력에 따라 짝을 맺어주는 ‘커플매니저들’, 땅투기에 눈이 뻘건 복부인들이 한국의 대표적인 자본속물들이다. ‘명품족’, ‘웰빙족’은 이들의 응석받이 아들이며, ‘몸짱’, ‘얼짱’은 이들의 어여쁜 딸이다.

셋째는 교양속물이다. 이들에게 지식과 교양은 인간과 세계를 탐구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토대가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치장하는 장식이자 출세의 발판이다. 현학이 이들의 무기이며, 곡학아세가 이들의 특기이다. 이미 19세기말 니체가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구더기떼들”이라고 힐난한 바 있는 ‘교양속물’은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도 광범위하게 진을 치고 있다. 이들에게 앎과 삶은 별개의 세계이고, 머리와 손은 따로 놀며, 입과 발은 별거 중이다. ‘학벌사회’의 습속이 골수에 박힌 한국형 교양속물들은 누구를 만나든 출신학교부터 묻고, 학문적 경지보다 학문적 태생에 관심이 많다. 말끝마다 영어 단어를 물고 다니며, 미국에 대한 존경심이 남다르다는 점도 이들의 한결같은 특징이다. 

속물근성의 전사회적 확산은 한국현대사의 특정단계를 반영하는 현상이다. 군부독재 시대의 ‘폭력사회’, 민주화 과도기의 ‘부패사회’를 거쳐, 이제는 ‘속물사회’에 진입한 것이다. 폭력사회는 민주혁명에 의해 지양되었고, 부패사회는 법치의 정립으로 일정 정도 청산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속물사회는 혁명으로도 법률로도 치유될 수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권력과 돈과 학벌보다 인간을 중시하는 완전히 새로운 문화를 창출할 ‘문화혁명’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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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용 2004-03-17 22:02:39
지식인들이 세상을 향해 호통을 치는 이런 글이
좋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니 지식인들도
그저 곡학아세로 편안함만을 추구할려고 합니다.

정치권을 욕하다가도, 대중들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는
머뭇거리거나. 대중들을 찬양하며 아부하는 역겨운
지식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