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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의시간-엄격함을 가르치는 이유
나의 강의시간-엄격함을 가르치는 이유
  • 김인섭 숭실대
  • 승인 2004.03.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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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섭 교수(숭실대 문예창작학과)

아직도 기억에 남는 학창 시절의 몇몇 스승의 강의부터 소개하고자 한다. 학부 신입생 때, 기독교 관련 교양필수 과목을 목사님이신 교수님께 들은 적이 있다. 독실한 신자로 보이는 학생 몇몇을 제외하곤 모두들 마지못해 듣고 있어, 수업분위기가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아 있었다.

 

교수님은 이런 상황에도 개의치 않고 흐트러짐 없이 당신의 말씀을 끝까지 마치시곤 했다. 그런 모습이 한 학기 끝날 때까지 한결같이 계속되자, 수업에 관심을 보이는 학생들이 되레 늘어났고, 신앙에 회의적이었던 나도 이미 수업에 깊이 빠져 있었다.

학부 2학년 때의 ‘시론’ 전공수업은 시간개념이 없는 강의로 유명했다. 수업 시간에 20~30분 늦게 들어오시는 경우도 다반사지만, 수업시간을 한참 지나 강의가 끝나기도 일쑤여서 어떤 때는 여섯 시간 넘게 수업을 한 적도 있었다. 그날 수업시간에 말씀하셔야 하는 건 모두 쏟아 놓아야 직성이 풀리시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엄청난 집중력에 질렸던 그 강의는 내가 지금까지 시를 가르치는 데 보이지 않는 암반 같은 것이 되고 있다. 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스승처럼 끈질기고 골똘한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펼치는 힘을 어느 정도 흉내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대학원 석사과정 시절, 엄격하기로 악명 높은, 논문지도 교수님의 강의는 매우 혹독했다. 입학 후 첫 수업시간, 동료 몇이서 시작 시간에 40초 정도 늦게 도착한 일로, 학문할 기본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고 정신없이 야단을 맞은 적이 있다.

 

너무 심하다는 감정적 반발심, 석·박사 선배들에 대한 무안함 등이 엉켜 분한 마음을 당시로서는 누그러뜨릴 수가 없었지만, 선생님 말씀이 틀린 것이 아닐수록 오기는 더 뾰족해졌고, 나만의 학문적 자질을 발견하는 기쁨도 얻었다. 아울러, 자기 자신에 대한 혹독한 엄격성은 자신 속에 고여 있는 소질과 능력을 우려내어 자신만의 빛깔과 향기를 뿜어내는 도가니 같은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해주었다.

돌이켜보면, 강의를 듣는 ‘나’의 입장을 배려해준 그분들의 흔적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당신’의 의지, 소신을 앞세우신 분들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수업들은 아직까지 내 의식 속에 살아 있고, 그 지식들은 문제의식을 올곧게 다지는 금쪽같은 보배들이 됐다.

 

또한 주위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당당함, 자신의 내면에 고인 것을 모두 뿜어내는 열정,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약속을 지키는 엄격함 등은 지금 강의를 하고 있는 나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수강생들의 욕구나 기대에 그다지 눈길을 주지 않는 편이다 보니 ‘수업은 흥미있게 진행되었느냐’는 강의평가 질문에서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더 많이 듣고, 수업시간에 못다 한 이야기들은 이따금 학교 앞 술집에서 이어지니 학생들의 귀가시간이 늦어지는 일도 다반사다. 이웃집 아저씨 같이 편안한 사람이라는 말도 듣지만 ‘농담이 없으신 분’이라 사소한 것을 지나칠 수 없다는 고백도 듣는다. 그래서 가장 부담스럽고, 곤혹스러운 선생 중의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재학생 시절 고통스러워하고 불만을 터뜨리던 제자들이 졸업 후 찾아와 문학에 대한 자신의 각오와 다짐을 당차게 이야기해줄 때 ‘헛되지 않았구나’라는 안도감을 가지게 되고, 저 정도면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문학적 여정을 꿋꿋이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마저 가지게 되면 흐뭇하기까지 하다.

요즘 공부는 재미있어야 하고, 이른바 ‘수요자’의 기호와 적성을 고려한 효과적인 교수법이 요구되며, 정보화 시대에 걸맞게 다양한 학습도구도 개발해야 한다고 한다. 옳은 말이고 외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하지만 교육은 운동선수들이 스스로에게 엄격한 가운데 혹독한 훈련을 거쳐 자신도 미처 느끼지 못한 그만의 소질과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앞서 가지게 된다.

 

그래서 지금도 스승들의 모습들을 떠올리며 이따금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는 수업에 흔들림 없이 임하고 있는가', '나는 나의 모든 능력을 뿜어내고 있는가', '나는 학생들에게 야속하리만큼 엄격함을 요구할 수 있고, 요구하고 있는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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