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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근대국어의 탄생] 이연숙/히토츠바시대 사회언어학
[번역과 근대국어의 탄생] 이연숙/히토츠바시대 사회언어학
  • 이연숙 히토츠바시대
  • 승인 2001.04.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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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4-02 00:00:00
근대가 민족국가의 형성과 맞물린다면 그 근간에는 언어가 있다. 이른바 ‘국민’이 형성되는 데 필요한 동질적인 그 무엇은 바로 ‘국어’였던 것. 그렇다면 ‘근대국어’라는 단어는 기실 동어반복일 수 있다. 유럽에서는 식자들의 언어였던 라틴어로부터 민족어로의 번역작업이 시행되면서 근대어는 확장과 심화를 겪는다. 그러나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우는 서양으로부터의 번역이었기에 지리적으로, 시간적으로 언어의 확장을 겪게 된다. 일본어, 즉 ‘고쿠고’ 연구에 주력해왔던 이연숙 교수의 글을 통해 근대일본어의 탄생과 번역 사이의 관계역학을 살펴본다.

차례 ①번역의 식민성과 탈식민성 <2>번역과 근대국어의 탄생 ③국학번역의 현황과 과제 ④번역과 탈식민의 모색

‘국어’라는 관념은 근대세계에 존재하는 특유한 것이다. 근대 유럽에서 ‘국어’라는 사상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각 민족어가 라틴어의 지배에서 벗어나 고유의 성격을 지닌 자립한 훌륭한 언어라는 인식을 육성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과정은 근대적인 국민국가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과 평행 관계에 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이 19세기 이후의 동아시아에서도 일어났다. 다만, 유럽에서는 라틴어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면, 동아시아에서는 고전 한문의 지배로부터의 탈각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 정도이다. 일본의 경우는 한문의 지배력이 조선이나 베트남보다 약했기 때문에, 한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가 비교적 쉬웠다. 일본에서는, 당시의 조선이나 베트남과는 달리, 한문을 일본어 어순으로 변환시켜 거기에 조사나 조동사의 요소를 덧붙여 읽었다. 그래서 이른바 漢文訓讀體라는 일본어 특유의 문체가 생겨난 것이다.

근대언어는 근대사회의 필요조건

한문 세계로부터의 이탈은 사회적으로도 대단히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문에서의 이탈이란, 곧 유교에서의 이탈, 더 나아가서는 중국 고전 세계에서의 이탈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메이지 초기 계몽사상가로 큰 영향을 끼쳤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그때까지 교육의 유일한 기둥이었던 사서오경의 권위를 부정했던 것은,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사회의 근대화는 언어의 근대화를 요청하는 반면, 언어의 근대화가 없으면 사회의 근대화도 진전되지 않는다. 에도(江戶) 시대 때부터 쇄국정책을 고수했던 일본은, 언어적으로도 쇄국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유럽이 낳은 각 방면의 다양한 근대적 개념을 표현하는 도구가 전무한 상태였다. 사회, 철학, 권리, 자유 등등 지금 사용되는 거의 대부분의 근대적 어휘는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메이지 시대에 번역을 통하여 만들어 낸 것이다. 이 때 이러한 번역을 통한 새말의 창조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한 가지는 완전히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종래 사용되고 있던 한자어에 새로운 용법과 의미를 부여해서 쓰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거의 의식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현재 일상 생활에 사용되는 근대적 개념을 나타내는 근대적 어휘는, 거의 대부분이 메이지 시대에 일본에서 먼저 한자어로 번역되어, 그것이 중국, 조선에 역수입된 것들이다. 예를 들자면 끝이 없지만, 여기에서 약간의 예를 들어본다.
과학, 시간, 공간, 이론, 법칙, 사상, 문화, 문명, 법률, 종교, 관계, 철학, 정신, 표상, 분석, 종합, 개념, 감성, 기호, 이성, 의식, 주관, 객관, 법률, 경제, 자본, 교환, 계급, 분배, 생산, 정책, 정당, 사회주의, 공산주의, 물리, 물질, 분자, 원자, 질량, 고체, 자극, 단위, 소화, 문학, 비평, 작품, 희극, 비극, 미술 등.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일본제 한자어는 서양의 근대 어휘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이러한 근대적 어휘의 탄생은 종래의 고전 한문 세계와 완전히 결별했음을 명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고전 한문 세계로부터의 탈피는, 역설적이게도 한자어를 엄청나게 증가시켰다. 고전 한문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한문에서는 허용될 수 없었던 용법이나 조어법을 이용한 한자어가 대량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언어란 단어의 차원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언어의 근대화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문체의 확립이다. 특히 입말과 글말을 일치시키는 것, 즉 ‘언문일치’는 국민국가의 대단히 중요한 과제였다. 왜냐하면 근대는 엘리트층만이 아니라 모든 계층의 사람을 포괄하는 언어양식을 꼭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물론 입말과 글말의 완전한 일치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입말에 근거한 새로운 글말을 창출해 내는 것이, 근대국가에는 더욱 급한 목표였다.

국어보다 국어다운 번역어

여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번역작업이었다.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입말체 소설을 썼던 이는 후타바테 시메이(二葉亭四迷)였는데, 그의 창작인 ‘우키구모(浮雲)’보다 러시아의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번역한 ‘밀회’가 훨씬 근대적이고 자유로운 문체를 구사했다는 데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당시의 독자는 ‘밀회’를 읽고 입말로 이렇게 신선하고 깊은 맛이 나는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며,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즉, 외국문학을 입말로 번역하는 작업 자체가 지금까지 얽매어 있던 인습적이고 전통적인 문체와 표현을 버릴 수 있는 무대와 용기를 제공했던 것이다. 후타바테는 소설을 쓸 때에도 생각대로 문장이 잘 안 써지면 먼저 러시아어로 써 보고 그것을 일본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들은 근대적 언어양식을 낳는 진통과 같은, 표현의 자유와 언어규범의 갈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언문일치라는 표현의 공간을 벗어나, 언어적 제도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그 때까지 예상할 수 없었던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언문일치운동이 추구한 글말은 민중이 쓰고 있는 일상적인 방언에 그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적 중심이 될 만한 입말의 틀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국가의 언어적 제도는 입말의 차원에서 성립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민중들이 그때까지 쓰고 있었던 다양한 방언은 표준어 교육을 하는 가운데에 멸시당하고, 엄중하게 배제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국민국가에서 언문일치는 대립된 두 방향에서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특권적 엘리트 문화의 부정이라는 ‘민주적’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표준어 교육을 통해서 말글 세계가 인위적으로 균질화되어 표준어 이외의 언어가 공적 공간에서 배제되는 방향이 그것이다.
일본어가 ‘고쿠고(國語)’라고 불리우게 된 것은, 메이지(明治) 시대에 이르러서부터이다. 사실 ‘고쿠고’라는 말 자체가 메이지 중반까지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대일본제국헌법의 발포에서 청일전쟁에 이르는 과정에서 국가의식이 고양되면서, 점차 ‘고쿠고’라는 의식이 정착되었다. 그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동경제국대학 교수였던 우에다 카즈도시(上田万年)였다. 1894년 6월에 3년 반 동안의 유럽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우에다는, 그 해 10월에 ‘고쿠고와 국가’라는 강연을 한다. 때는 마침 청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였다. 우에다는 국가를 정치적 제도만으로 생각하지 않고, ‘국민’ 전체를 통합하는 유기체로 파악했다. 그리고 그 유기체에 생명을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것을 언어로 보았다. 이같이 ‘국가’와 불가분하게 맺어진 언어를, 우에다는 ‘고쿠고’라고 불렀다. 우에다는 ‘일본어는 일본 사람들의 정신적 혈액’이며, ‘일본의 국체는 이 정신적인 혈액으로 유지된다’고 못을 박았다.

‘고쿠고’는 일본인의 정신적 ‘혈액’

그렇다고 우에다가 말하는 ‘고쿠고’가 있는 그대로 말해지는 말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고쿠고’란, ‘국가’, ‘국체’와 일체화한 언어의 이상형을 가리키는, 고도로 정치적인 개념이었다. 戰前의 일본의 표준어 정책도 우에다의 고안에 의해 진행되었다. 표준어를 ‘동경의 중류 사회에서 쓰는 언어’로 정하고, 각 지방의 다양한 방언을 쫓아내는 것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심지어 학교에서는 방언을 쓰는 학생들의 목에 ‘방언패’라는 것까지 걸어가며 방언 교정을 시행했던 것이다.
또 일본은 대만, 사할린, 조선을 식민지화해 가면서 일본인 이외의 타민족을 ‘일본국민’으로 통합해야만 했다. 우에다의 정의를 충실히 따르자면, 식민지의 피지배민족에는 ‘정신적 혈액’으로서 ‘일본어’가 흐르지 않는다. 이 때 처음으로 일본인이 아닌 사람들을 ‘일본인화’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 요구에 가장 강력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 ‘고쿠고 교육’이었다. ‘일본어=고쿠고’라는 등식을 가르침으로써 피지배민족을 뼛속에까지 ‘일본인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식민지 정책은 군국주의의 출현이라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메이지 이래의 근대 일본이 짊어졌던 ‘일본인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도 파악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일본 국내의 표준어 교육과 식민지의 ‘고쿠고’ 교육은, 한 덩어리의 ‘일본인’, 나아가 ‘일본국민’을 만들어 가는 가장 중요한 토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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