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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論: 강선학의 송수남 展 비평(교수신문 3.8일자)을 읽고
反論: 강선학의 송수남 展 비평(교수신문 3.8일자)을 읽고
  • 조은정 한남대
  • 승인 2004.03.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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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의 水墨 앞에서 한국화의 힘을 본다

‘우리 시대의 수묵인 南天 송수남’展에 대한 강선학의 의문은 타자와 정체성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됐다. 사실 남천의 한국화 정체성에 대한 관심은 현대 한국화의 화두였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 화두를 끝까지 놓지 않고 화력 50년을 맞은 작가가 우리 화단에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전체로서의 부분인 미술의 현상 대 작가를 살필 때 남천의 개인적 화력은 한국현대미술사의 한 표본이다. 남천의 한국화는 애초에 한국적 재료를 갖고 전통의 계승과 한국적 미술의 구현이라는 데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960년대 단청, 색동, 석탑 등 한국적 이미지를 화제로 끌어들인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1960~70년대 산수에서는 겸재의 해색준과 송간묘선이 구사되고 있어 한국적인 표현을 위해 진경산수에 착안해 얼마나 많은 연구를 진행했는가를 알 수 있다. 1980년대의 ‘장강’에서는 당시 한국화단에 들어온 중국의 장대한 화폭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으며 1990년대 이후 ‘붓의 놀림’과 ‘묵상’에서는 심적 상태의 반영으로서의 추상적 화면을 느낀다.

‘붓의 놀림’이 한국화의 정체성과는 전혀 관계없는 추상이라는 강선학의 지적은 형식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평자의 그것이 다름을 드러내는 예다. 미술사적으로 주요한 추상표현주의 는 동양의 사유와 필, 먹에 빚지고 있다는 소박한 발상은 과거 한국화가들 대개의 공유된 정보였다. 사실여부는 동서미술사의 정밀한 비교를 통해 확인이 이뤄져야 할 터지만 적어도 우리 한국화를 새롭게 한 동인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남천의 수묵을 ‘수묵정신’이나 ‘선비정신’ 운운하는 것은 과도한 의미부여라는 강선학의 지적에는 일견 수긍되는 점이 있다. ‘먹도 색’이라는 감각을 숨긴 채 채색과 구별해 먹의 ‘다름’을 강조하다보니 스스로 타자화하는 상황에 처한 게 수묵운동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남천의 최근작에서 흥미로운 건 ‘띠그림’이다. 굵고 가는 선 또는 짙고 옅은 먹에 의해 표현된 띠그림은 일면 옵티컬하다. 색띠가 추상으로서 박서보의 어느 면과 유사하다는 강선학의 지적은 표피적 형태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내게는 그 색띠가 0과 1로 이루어진 컴퓨터, 세계의 매트릭스를 연상시키는 기호, 陰陽消息觀의 형상화로 읽혀진다. 색띠들이 들숨과 날숨, 음과 양의 추상적 표현이라는 확증은 한국적인 표현을 위하여 일찍이 겸재, 단원, 민속자료와 한국인의 생사관에 대한 관심을 증진시켜온 작가의 이력에 있다.

오리지낼러티를 의심받는 유사성은 작가에게는 치명적이다. 남천의 문자, 산수, 선염, 추상적 형태 등이 ‘유사’라는 덫에 걸릴 위험이 있음을 경고한 강선학의 지적은 타당하다. 하지만 한국미술사 전체를 통괄해 수묵채색의 정신이 그 오리지낼러티보다는 시대를 사는 사람의 심적 표현의 곡진함에 있다면, 남천의 화면을 다시 살펴야만 한다. 과거 작가들 또한 전통의 이름으로 자신의 감성을 표현하는 데 시간을 들여왔다.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며 형식 자체가 내용이 될 수도 있다. 운두준과 해색준이 흐드러진 70년대의 산수와 2000년대의 색띠는 일견 달라 보이지만 적어도 작가가 다룬 제재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다. 작가에게 금강산이 우주 삼라만상의 표본이었던 것처럼 굵은 선과 가는 선의 조합은 자연의 구성원리에 대한 도해일 뿐이다.

동양화라는 ‘조선미술전람회’의 한 분야가 ‘한국화’라는 명칭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해서 한국의 그림이냐 하는 문제는 일제 강점기에서 시작된 모순이다. 수묵과 채색의 문제가 바로 일제 때 시작됐고 왜색 탈피의 당면과제 아래 한국 현대미술사는 전통과 혁신, 두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광복 60년이 돼가는 지금 ‘우리 시대의 수묵인, 남천 송수남’전은 오늘 지금 왜 다시 수묵인가라는 진지한 물음을 동반해 현대미술에서 한국화의 정체성에 대한 담론의 장을 마련한 의미 있는 전시다. 강선학은 남천의 수묵은 한국화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현대화로서의 한국화에 대한 모색이었기에 개인적 필연성에 의해 추상에 도달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모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먹의 무한한 표현력은 결코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한국화의 마력임을 알기에 남천의 수묵 앞에서 현대 한국화의 여정을 돌아보며, 세계관의 표현으로서 수묵의 힘을 기대하는 것이 오늘날 현대 한국화의 현재다. 

필자는 이화여대에서 조선시대 미술사를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 전후기 조각에서부터 근현대 조각에 대한 논문을 많이 발표했다. 저서로 ‘백제의 조각과 미술’, ‘우리다운 미술과의 만남’, ‘한국 조각미의 발견’, ‘근대를 보는 눈-조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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