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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문화 칼럼] 죽어있는 전시, 살아있는 현장
[김희철의 문화 칼럼] 죽어있는 전시, 살아있는 현장
  • 교수신문
  • 승인 2020.07.28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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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박물관 '청계천 벼룩시장, 황학동' 전시 리뷰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잠시 문을 닫았던 전시장, 박물관들이 일제히 재개관했다. 미리 예약을 해야 입장을 하거나 현장에서 QR코드를 등록하고 입장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긴 해도 감수할 만하다. 사람은 역시 콧바람을 쐬어야 산다. 

서울시 성동구 청계천로 530에 위치한 청계천박물관

청계천 박물관을 찾았다. 4층에서 시작, 2층까지 관람하는 구조의 상설전시관에서는 청계천과 그 주변의 역사, 변모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청계천은 조선의 수도, 한양 땅을 가로지르는 하천으로서 백악산(북악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등의 여러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들이 모여 중랑천에 합쳐지고 결국 한강으로 들어간다. 하천의 윗동네, 광통교 위쪽은 이른바 웃대 또는 상촌이라 불렸다. 중인 계층의 예술 활동 무대가 되곤 했는데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를 펼친 곳도 이곳이다. 궁궐과 관청이 많은 북촌에는 권세 높은 양반들이 많았던 반면, 벼슬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살던 청계천 아래동네, 남산 기슭 남촌은 술을 잘 빚는 동네였다고 한다. 광통교에서 효경교까지의 지역은 중촌이라고 했는데 시전 상인들과 기술직 중인들이 모여살았다. 조선 말기엔 이곳이 개화운동의 중심지였다.   

일제강점기의 수탈적 농업정책으로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자 청계천은 오염되기 시작했다. 생활하수와 산업폐수가 뒤섞여 전염병을 발생시켰다. 무분별하게 지어진 판자촌은 1960년대가 되어서 철거되기 시작했지만 제대로 된 이주정책이 아니라 마구잡이식으로 몰아내기였고 그로 인해 도시빈민 운동이 시작되기도 했다.  

1958년부터 77년 가지 청계천 복개 사업이 진행되었고 그 위에는 고가도로까지 만들어졌다. 이른바 산업화 ·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청계고가도로 주변엔 공장들이 많았다. 살인적 노동환경에서 휴일도 없이 물건을 만들어내던 노동자들 중에 전태일이 있었다. 그는 노동자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음을 외치면서 청계천 평화시장 입구에서 분신했다. 한국 사회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청계천이 얼마나 많은 비극과 우여곡절을 겪으며 흘러왔는지 박물관의 상설전시를 통해 그 과정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다. 

청계천 판자촌을 재현한 미니어처

박물관 1층에서는 <청계천 벼룩시장, 황학동>이라는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황학동은 한국전쟁 이후 전란 통에 쏟아져 나오는 군수품과 고물들을 사고팔던 동네로 지금도 동묘역 주변 벼룩시장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황학동 기획전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박물관에서 1.8km 거리에 도보로 30분이면 갈 수 있는 벼룩시장에 살아있는 전시가 펼쳐지고 있는데 굳이 헌 물건들 조악하게 전시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동묘 벼룩시장

실제로 필자는 박물관을 빠져나와 동묘역 쪽으로 걸어갔다. 헌 옷, 골동품뿐만 아니라 저렴한 새 상품들이 진열된 간이 판매대, 구식 라디오의 잡음 하나 없는 선명함에 자부심 갖는 상인의 표정, 잔술로 파는 막걸리에 어묵 한 꼬치 베어 먹는 선술집 등 생동감 넘치는 삶의 현장이 그곳에 있었다. 박물관 속 죽어있는 전시는 무료였지만 박물관 밖 살아있는 현장을 구경하는 입장료 대신 바지 한 벌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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