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惑愛(혹애) 퇴계, 사랑을 하다(17)
惑愛(혹애) 퇴계, 사랑을 하다(17)
  • 교수신문
  • 승인 2020.07.28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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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예쁜 딸, 설이

잠시 멈춘 뒤 퇴계는 말을 이었다.

"예의를 사람의 도리(道理)라고 하지 않더냐. 도리라는 낱말은 유학이 가장 강조하는 두 가지(道와理)가 모두 포함된 말이니 이보다 더 높이 치는 말은 없을 것이다. 옛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사람이라면 마땅히해야할 기초 중의 기초'로 예의를 꼽은 것이지. 예의의 핵심은, 자기의 본성을 지켜 총실한 것과 타인에게 자기에게 하는 만큼의 존중심을 가지는 것, 이 두 가지로 볼 수 있단다. 사랑에 대한 예의 또한 사랑하는 자기의 본성을 살피는 것과 타인에게 똑같은 정성과 존경을 지니는 것이 아니겠느냐."

"제가 세상에 태어나서 들은, 사랑에 대한 최고의 강의입니다. 상열은 예절이라는 말씀,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나으리의 말씀을 들으니, 저 매화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옵니다. 대체 저도 수매는 언제쯤 꽃을 피울지요?"

"허허. 너무 조급해하지는 말아라. 너도 알고 있겠지만, 방용(放翁·남송의 시인 육유(1125-1209))의 매화시가 이미 말해주고 있지 않느냐. 내가 시가로 한번 읊어볼 테니 네 거문고로 음률을 골라보려무나."

퇴계가 주는 술잔을 받아 마신 뒤 두향은 거문고를 다시 안는다.

깊은 골짜기에다 북쪽으로 벋은 가지인지라
해마다 꽃 피는 때가 늦다고 그대는 투정이지만
품격 높고 빼어난 운치를 그대는 모르는가
층층이 언 얼음과 겹겹이 쌓인 눈의 시절이 매화의 계절임을

幽谷那堪更北枝 유곡나감갱북지
年年自分著花遅 연년자분착화지
高標逸韻君知否 고표일운군지부
正是層 積雪時 정시층빙적설시

“아무리 모진 추위라도 매화는 이기고 봄을 만들어내는 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느니라."

”방옹의 시에는 나으리가 지닌 그 깊고 은근한 혹애(惑愛)가 느껴집니다. 외람되지만 제가 한 수 읊어도 되겠사옵니까.“

"허허, 그리하여라.“

매화 꽃송이는 새벽바람에 터진다는 얘길 들었는데 
눈같이 흰 매화 쌓여 사방산에 가득하네

내몸이 어찌하면 천억개로 변하여
매화한 가지마다 방옹한 사람설수 있으리


聞道梅花圻曉風 문도매화탁효품
雪堆遍滿四山中 설퇴편만사산중
何方可化身千億 하방가화신천억
一樹梅花一放翁 일수매화일방옹

"허어, 좋구나. 매화에 대한 저 평등한 마음이 바로 사랑의 본질이겠구나. 온산의 매화를 하나하나 정성을 기울여 대하려는 방옹의 마음이, 우리가 평생 가꿔야할 사랑이 아니겠는가.“

"과연 그러하옵니다. 나으리."

"오늘은 헤어지기가 몹시 아쉽지만 밤이 늦었으니, 가서 쉬도록 하여라. 너로 하여 한 사람이 크게 위안을 받았구나.“

"예. 저도 그러하옵니다. 나으리. 그럼, 소녀 물러가겠습니다.“

한양의 서소문 부근, 매미 소리가 귀를 울리는 저녁답. 핼쑥한 한 여인이 다가왔다. 품에는 아기를 안고 있다. 여인이 활짝 웃었다. 이황은 그녀를 향해 급한 마음으로 달려갔다. 부끄러운 듯 아기를 보여주는 그녀는 둘째 아내 권씨였다. 

"부인,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소. 이렇게 귀여운 딸을 낳아주다니, 고맙기 그지없소." 그가 말을 건네자, 여인은 전에 없이 또 아련한 말투로 말한다. "참으로 귀여운 아기예요. 나으리가 보시고 이름을 하나 지어주세요."

이황은 건네받은 아기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눈시울이 꿈틀꿈틀하고 손이 고물고물하는 모습이 그지없이 예쁘다. "어렵사리 피워낸 꽂이니 '설(눈)'이라 하면 어떻겠소?" 여인은 이황의 눈을 가만히 쳐다본다. "설이라 하면, 봄날 눈처럼 핀 매화를 말하는 것인가요? 참으로 곱고 어여쁜 이름이옵니다. 설아, 설아. 아버지가 네게 설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단다. 기쁘지 않니?“

아기를 가만히 흔들자 문득 설이가 싱긋 웃음을 짓는다. 아내는 설이를 받아안고 문득 뛰어간다. 그런데 뒤에서 보니, 아내의 발이 맨발이다.

이상국 / 작가, 시인. 아주경제 논설실장
이상국 / 작가, 시인. 아주경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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