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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고속철과 지역의 時間
문화비평: 고속철과 지역의 時間
  • 김용규 부산대
  • 승인 2004.03.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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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사는 사람들은 4월 고속철의 개통을 부푼 기대감을 갖고 기다리고 있다. 대학 시절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서울까지 가는 데 8시간이 걸렸던 기억을 떠올리면 서울까지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믿기지 않는다. 어쩌면 부산역사의 새 장이 쓰여 질지도 모르겠다. 1904년에 개통된 경부선과 1970년에 완공된 경부고속도로에 이어 고속철도의 개통은 지역현실에 획기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부산시민은 그 변화가 무엇이든 침체한 지역현실에 많은 경제적 혜택과 분권의 자율적 권한들이 속속 실려 오기만을 희망하고 있다.

자주 서울에 가야했던 개인적 입장에서도 서울 가는 편한 길이 기다려진다. 서울 가는 길은 항상 지겨웠고 심한 두통을 동반하기 일쑤였다. 최근 들어 서울 가는 횟수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아마 3시간 미만이라면 상쾌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지겨움과 두통만은 사라지거나 완화될 것이다.

하지만 지겨움과 두통이 소멸되고 완화되는 데 모종의 함정 같은 건 없을까. 지겨움과 두통으로부터의 해방 때문에 그것을 만든 원인은 잊혀지지 않을까. 지겨움과 두통은 중앙과 지역 간의 넘을 수 없는 간극과 거리가 개인적 차원에서 표출된 것은 아닐까. 사실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지겨움과 두통의 소멸이 지역의 시간과 중앙의 시간 간의 간극이 사라지고 그 틈새가 메워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반드시 좋은 일이라고만 할 수 없다. 지역의 입장에서는 중앙이 그동안 누려온 여러 가지 혜택을 공유할 수 있게 되겠지만, 다른 한편 사라져가고 있는 지역의 시간과 문화적 고유성은 고속철의 속도만큼이나 신속하게 사라져갈 것이기 때문이다. 

기차는 어떤 목적지를 향해 쉬지 않고 나아간다는 점에서 근대적 발전과 진보의 상징이다. 하지만 기차가 상징하는 발전과 진보의 성격은 지역과 중앙에 따라 차별적 의미를 갖는다. 근대화 과정 속에서 기차는 중앙에서 지역으로 문명화의 이념을 실어 날라주는 대가로 지역의 인적·물적 자원을 모두 중앙으로 가져갔다. 지역의 차원에서 볼 때, 기차는 모든 지역의 시간을 억압하고 중앙의 시간만을 강요한 중앙집권의 실행자였으며, 지역의 시간을 중앙의 시간에 맞추도록 하는, 즉 지역을 중앙으로 통폐합하는 국민화와 근대화 과정의 상징적 이미지였다. 따라서 기차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지역의 낙후성에서 벗어나 중앙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갈망과 좌절을 상징할 수밖에 없었다.

근대국가의 건설과정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이질적이고 불균등한 지역을 일원화된 국가 속으로 통합하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관리와 기획과 같은 행정기능을 중앙에 집중시키고, 지역에는 중앙의 기획관리 하에 특정한 실행적 역할만을 담당케 하는 이원적 구조를 정착시켰다. 지역의 삶이 끊임없이 부침을 거듭해온 데는 바로 지역과 중앙의 권력관계, 나아가서 중앙에 의해 특화된 역할만 부여받은 채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기획하지 못하는 지역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 지역은 아주 역설적인 현실에 직면해 있다. 한편으로는 지역이 자신의 삶을 자율적으로 꾸려나가게 될 지방분권의 시대를 바로 앞에 두고 있는 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시간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 중앙의 시간에 더욱 종속될 고속철 시대를 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지방분권이 지역과 우리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간의 기억들을 존중하는 문화의 분권으로 이어지지 못할 때, 그리고 지역의 시간을 억압했던 경제와 개발의 논리가 분권의 주된 논리가 될 때, 고속철 시대를 맞이하여 지역문화의 시간은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다. 이제 지역의 시간을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때인 것 같다.

김용규 / 부산대 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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