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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이성원 교수의 서평(교수신문, 198호)에 답한다
[반론] 이성원 교수의 서평(교수신문, 198호)에 답한다
  • 남수인 상명대
  • 승인 2001.04.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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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4-02 00:00:00

남수인 / 상명대·불문학

데리다가 읽혀지기만 하는가. 그뿐이라면,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문체는 논리적 사고 이외에도 시인과 같은 감수성을 반영하기에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매혹한다. 그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지만 미국에서 여러 해 전부터 정규적으로 프랑스 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미술평론도 한다.

‘글쓰기와 차이’는 데리다가 1959~1966년 사이에 발표한 10편의 에세이를 묶은 것이다. 제목이 웅변하듯 여기서 데리다는 루세, 푸코, 야베스, 레비나스, 아르토, 바타유 등의 분석을 통해 ‘글쓰기’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레비나스론인 ‘폭력과 형이상학’은 그 가운데 한 편이며, 이 책 속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주관적인 하나의 의견일 뿐이다. ‘글쓰기’는 이 에세이들에서 시작해 그 이후로도 계속 데리다의 사유 중심이 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철학자들만이 잘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레비나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데리다의 레비나스를 잘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지식이 ‘글쓰기와 차이’의 번역을 완벽하게 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성원 교수는 나의 데리다 번역을 단 한마디로 말뜻이 통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했고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그리고 “예비 지식 불충분”을 두 가지 예로 뒷받침해 지적했다. theoria의 번역 오류와 ‘Wunderblock’에 대한 역주 부재. 전면적 부정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래도 나 역시 국어로 생각하고 말하고 쓴다는 것 이외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번역자격 문제와 결부된 구체적인 두 가지 예에 대해서는 다행히 할 말이 있다.

‘번역은 반역.’ 사실 번역자는 누구나 매시간 그 말을 실감한다. 그에 대한 의식과, 자조와 함께 번역한다. ‘반역’이 자신의 번역능력을 넘어서는, 어쩌면 무관하기까지 한, 언어 내적인 성질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번역의 반역’은 말하자면 언어에 의해 操作된다고 할 수 있다. 구문의 차이, 어순의 차이만이 난관을 만들지 않는다. 詩語의 경우, 단어의 선택을 결정하는 것은 의미 이외에도, 연상적 이미지, 韻, 음절 등 다양한 요소이다. 문화적 실태들과 연관되는 집단 연상이미지, 운이나 음절은 번역 불가능의 영역이다. 사고방식에 의한 표현의 차이도 있다. 그리고 보다 기본적인 문제. 외국어와 우리 단어들 사이에 전면적인 일치를 보이지 않는 것 역시 무수하다는 점이다. theoria도 그 한 예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경이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의 착각의 경이를 말해야하지 않을까?

이성원교수는 theoria를 ‘관조’로 옮겨야 한다고 했다. 과연 그러한가? 라루스의 ‘문학대사전’에 의하면 theoria는 theoros(연극 등 공연물의 관객이되 보기만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와 관계가 있다. theoria는 결국 “표상되고 있는 것에 적극적으로 임함”이다. 요컨대 관조 이상이다. theoria(그), the/orie(프), theory(영)는 불한, 영한, 철학사전(한국철학사상연구회편, 동녘)에서 이론(관찰, 관조의 적극적 참여의 결실인, 체계적으로 정리한 관념들)으로 옮겨지고 있다. 하나의 단어가 전달하는(커뮤니케이션) 기능을 가지려면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이는 의미를 띠어야 한다. theoria가 관조로 통하려면 우선 우리 사전에 수정을 가해야한다.

프로이트에 관한 글 가운데 나오는 “Wunderblock”에 대한 역주는 불필요했다. 프로이트론을 읽는 독자는 누구나 자연히 알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가 기억을 설명하려고 연구하다가 그 기구에서 영감을 받게되는 과정이 에세이에 상당히 자세히 기술되고 있으며, 기구의 묘사는 직접 인용(역서 p.351) 되고 있으므로. 내가 영어식 표현 ‘매직 메모’를 쓴 것은 매직이나 메모라는 단어들이 이제 우리말로 자리 잡고 있으며, 메모는 기록만이 아니라 메모장 역시 의미해서이다.

역주의 문제는 번역에 필수적인 예비지식의 범주와는 별개이다. 책의 기능에 대한 관점에 관련된 문제이다. 번역서가, 그것이 철학서든, 소설이든, 시집이든, 주해서의 기능을 겸해야할 의무가 있는가? 저자가 붙이지 않은 주를 왜 붙이며, 무엇을 어느 정도 설명해야 하는가? 이것은 책과 독자 사이의 관계설정에 대한 관점 문제이다. 역자의 자질이나 역량을 평가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

독자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부디 그 자체로도 희귀한 사태인 ‘뜻이 통하지 않는 우리말로 쓰여진 데리다’가 어떤 것인지 호기심으로나마 관심을 가져달라. 그래야 개정판은 가능하다. 발작의 ‘미지의 걸작’은 고운 여인의 자태가 있어야할 화폭 부분이 온통 얽히고 설킨 선들과 갖가지 색깔들이 뒤죽박죽 섞인 혼돈의 극치였다. 그런데 한 귀퉁이에 비죽 나온 여인의 발 하나가 있었다. 다시없는 아름다움이었다. 누가 아는가. 경이로운 발 그림 정도는 아니라도 발 형체를 연상시키는, 반듯한 한 두어 문장이 독자의 너그러움에 보답할지.

□ 이 글은 우리신문 지난호(198호, 3월 19일자)에 실린 이성원 교수의 ‘글쓰기와 차이’에 대한 번역서평을 보고 책의 번역자인 남수인 교수가 기고해온 반론이다. 이교수는 “원전을 읽은 독자가 때로는 원문과 대조하면서 읽어야 뜻이 통한다”면 번역서가 철학서로 기능하지 못할 것이라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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