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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바흐찐을 비평하다
우리말로 바흐찐을 비평하다
  • 여홍상 고려대
  • 승인 2004.03.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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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리뷰 : 『바흐찐 읽기』(이득재 지음, 문화과학사 刊, 2003, 312쪽)

▲ © yes24
오늘날 문학이론이나 비평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미하일 바흐찐(Mikhail M. Bakhtin, 1895∼1975)의 이름을 한번쯤 들어봤으리라 짐작한다. 바흐찐과 바흐찐학파의 저작과 2차 자료는 우리나라에도 이미 상당부분 번역, 소개된 바 있다. 그런데 이득재 교수가 지난해 말에 출간한 『바흐찐 읽기--바흐찐의 사상, 언어, 문학』은 러시아문학을 전공하는 저자가 펴낸 바흐찐에 대한 논쟁적인 비평서라는 측면에서, 국내 바흐찐 수용사에 있어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총 4부로 나누어진 이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는 바흐찐의 사상과 언어이론을 페미니즘, 후기구조주의, 비판이론, 칸트, 아렌트, 들뢰즈/가타리, 데리다, 비트겐슈타인 등, 현대의 다양한 대표적 사상가들과의 관련 아래에서 면밀히 비교 검토하고, 나아가서 후반부에서는 바흐찐 학파와 한국문학에서의 바흐찐 수용, 바흐찐의 소설·희곡 이론을 살펴보며, 러시아 문학에서 바흐찐의 실제적 적용을 시도한다.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조직이지만, 독립적으로 발표된 논문을 책으로 엮는 과정에서, 각 장의 서론이나 결론이 다른 장과 유기적으로 연관될 수 있도록 좀더 수정, 가필이 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바흐찐과 다른 현대 사상가들 사이의 차이점 및 유사점에 대한 자상한 ‘비교’는 간접적으로 바흐찐의 사상의 특이성과 우수성을 드러내는 데 중요한 전략임에 틀림없다. 바흐찐과 관련된 다양한 현대 사상가들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명쾌한 글쓰기는 무척 인상적이다.

그러나 바흐찐을 다른 사상가와 비교하는 데 너무 치중하다보니, 정작 바흐찐 자신에 대한 논의는 간혹 상당히 축소되는 측면이 있고, 경우에 따라 바흐찐이 경계한 이분법적 구분이나 구조주의적 도식화에 너무 빠져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기도 한다. 좀더 욕심을 부리자면, 단순히 서구 사상가들과의 비교를 넘어서서, 바흐찐의 독창적 사상이 당시 러시아의 비평계나 학문적 경향과의 어떤 구체적 관련과 맥락 속에서 생성됐는지에 대해 러시아문학 전공자의 입장에서 보다 자상하게 논의해줬다면 일반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바흐찐이 철학을 사유하는 방식은 서구적이지 않다. 그의 사유 안에서는 정신-육체, 주체-객체 등의 서구적이고 이분법적인 철학적 담론이 바흐찐적으로 독해돼 있다." -본문 224쪽에서

저자는 바흐찐의 사상을 '대화', '카니발', '크로노토프', '양가성', '사건의 철학', '행동의 윤리학', '타자의 타자성', '메타언어학'과 같은 몇 가지 핵심 개념으로 정식화하고 있다. 이러한 정식화는 분명히 바흐찐의 복잡다기한 사상의 진수를 일목요연하게 요약, 정리해주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바흐찐 자신의 풍부한 인문학적 담론을 몇 가지 어휘나 용어의 반복으로 환원해버릴 위험성도 없지 않다.

부분적 논의에도 불구하고 바흐찐과 바흐찐학파의 관계, 저작권 문제에 대한 저자의 입장이 다소 불분명하고, 바흐찐과 문화이론의 관계, 시 장르에서 바흐찐 이론의 적용 등이 제대로 다뤄지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이득재 교수의 저작은 그 동안 국내학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훌륭하고 묵직한 학문적 업적의 결집임에 틀림없다. 바흐찐에게 관심이 있는 여러 분야의 인문학자들에게 필독서로 권하고 싶다.

여홍상 / 고려대·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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