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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적 순결강박과 배타성...차이를 '인정'하자
이념적 순결강박과 배타성...차이를 '인정'하자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03.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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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_우리시대의 금기를 찾아서-끝 : 진보없는 보수, 보수없는 진보

▲한국의 진보진영은 내부를 순결하게 단속하려는 총괄성의 논리를 버리고 이상과 현실을 동시에 좇는 야누스적인 태도로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진보와 보수는 한국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이념적 용어들이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는 점에서도 매우 빈번히 거론된다. 예를 들면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에 필적할 그룹이 보혁 양쪽 진영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네오콘이 68혁명 식의 좌파이념에 대한 환멸을 자신들의 우익적 신념으로 치환하면서 성장한 것에서 드러나는 타이트한 공통 경험과 지향이 현 세대 한국의 진보와 보수 진영에 없다는 것이다.

가장 많이 지적되는 건, 진보를 너무 진보 일색으로 채우려하는 ‘총괄성의 논리’ 및 ‘내부 순결주의’다. 현재 진보진영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들여다보면 진보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과 보수적일 수 있는 것들이 뒤섞여 있는 상황인데, 진보진영의 생각이 정치적 표어로 뽑히고 이슈화 될 때는 판에 박힌 ‘반대’, ‘개혁’, ‘척결’ 일색이다. 즉, 담론화된 진보성이 구성원들의 의견을 대표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늘날 진보이념의 리얼리티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권혁범 대전대 교수는 ‘탈진보’를 외치는 대표적 학자인데 그는 “예전처럼 민족이나 계급문제가 최고의 가치라는 식의 절대적인 진리와 목표는 없다. 탈진보가 추구하는 진리와 목표는 구체적인 실천과 노력을 통해 항상 수정되고 재해석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주어지는 것 자체”라고 말할 정도다.

“보수=수구”라는 잘못된 인식 수정해야

하지만 언론이 주도하는 담론시장에서 보혁갈등은 친북과 친미, 시장과 분배 같은 이분법적 원칙론에 지배되고 있다. 학자들도 대체로 합의하는 사항이 “오늘날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은 북한에 대한 태도”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쪽 진영이 다른 진영의 생각을 설령 품더라도 표현할 용기가 없어진보에게는 보수가, 보수에게는 진보가 일종의 금기인 것이다.

진보 순결주의가 학술연구에 반영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많은 창의적인 추론들이 내부강령에 의해 배척되고 떨어져나갈 것이다. 민족주의적 역사연구나 대안사회 연구, 생태주의적 담론 등에서 ‘매끈한 완결성 추구’는 여러모로 무리를 일으켜 온 것이 사실이다. 최근 재연된 식민지 근대성을 둘러싼 논쟁에서 양쪽 진영이 한발 물러섬 없이 대치하는 모습도 이질적인 것에 대한 태생적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과장된 것일까.

얼마 전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좌도 보수가 될 수 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안 교수는 1960년대 대표적인 진보였다가 일본에 건너가 경제사를 연구한 이후로 이념적 전향을 감행한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과거에 국민을 계급적으로 나눠 적대적으로 사고하는 극소수 지식인이 남아있지만, 한국사회 전체를 놓고 보면 이젠 보수, 진보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는 단계”라고 얘기한다. 공존의 최우선 조건은 상대편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것이다. 그래야 진보도 보수가 될 수 있고, 보수도 진보가 될 수 있으며, 하나의 문장에 진보적인 것과 보수적인 것이 섞이더라도 앞뒤 안맞는 사람 취급을 받지 않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지적을 전통적인 보수에게도 똑같이 하긴 힘들다. 서구 보수주의 사상을 연구해온 이봉희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는 “보수주의는 대체로 서로 상충되는 목적들을 내재한다”라고 설명한다. 가령 복지국가 추구와 정부의 경제규제 반대, 시민의 자유와 노예제도의 옹호, 중앙집권과 다수에 의한 통치 등을 동시에 추구하기 때문에 하나로 묶기 힘들고 다차원적이란 얘기다.

물론 현대의 보수주의는 에드먼트 버크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대처와 레이건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내재한 경제철학으로 이어진다. 이 신보수주의는 경제적 단일시장을 추구함으로써 앞으로 세계정부를 배태시킬 수 있는 이론적 배경을 갖추고 있어 하나의 일관된 이념체계로 여겨지기는 한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가 분석했듯, 한국에서도 이런 신자유주의적 경제관·정치관·윤리관으로 무장한 젊은 보수주의 층이 형성되고 있다. 이른바 대학가에 떠도는 ‘청년보수’ 담론을 보면 그것의 발언이 본격화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생활 영역에 국한돼 실천되고 있다.

이들 이론적 보수와 생활보수는 정치적 실천과의연결루트가 구축되지 않아 또다시 보수라는 말로 막연히 묶이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때의 보수는, 매우 안좋은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경제적 특권과 학벌과 지연 등 기득권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과격하게 옹호하는 수구세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 수구세력에 대해 진보적인 학자들은 그 진영을 지탱하는 ‘자유 민주주의 이념’이 설득력이 매우 떨어지고 권력 기회주의, 냉전 반공주의 등 구시대의 청산해야하는 공공의 적들을 이념적 기반으로 삼는지라 현재는 퇴출 위기를 맞고 있다고 본다.
물론 기존의 주류 보수가 정치적으로 위기를 맞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

문제는 학계가 보수의 필요성을 원칙론적으로 옹호하면서도 한국 보수의 불임성을 정치적 기회주의자들의 탓으로만 돌리는 결과론적 분석에만 치중한다는 것이다. 홍윤기 동국대 교수는 보수의 불임성을 지적하는 자리에서 “한국의 보수주의는 빈곤하다. 보수성과 보수적인 것은 체감되지만 이즘은 파악되지 않고, 기질적·상황적 보수주의와 정치적·철학적 보수주의의 괴리가 극심하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문제는 이러한 분석들이 계속 중복 양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진보 학자들은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신보수의 정신세계에 쉽게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이런 논의들은 보수=수구라는 현재의 논쟁적 구도만 부채질할 뿐이다. 그러니 우리 사회에 보탬이 되고, 진보진영과 생산적 긴장관계에 놓일  건강한 보수를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나지 않고 있다. 미국 우파의 사상적 거점이자 본산이라 일컬어지는 해리티지 재단이 선거철 라디오 채널을 통해 전국적으로 무려 1천5백명의 ‘토론의 달인’을 가동시킨다는 소식과 비교해보면 빈약하기 짝이없는 상황이다.

자연스러움에 기반한 이념적 존재로

결국 문제는 이념적 강박의식으로 되돌아온다. 최근 황해문화에 ‘우리 시대의 진보에 관한 짧은 생각들’을 기고한 문화평론가 이재현 씨는 “혁명적 좌파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젠더와 섹슈얼리티 문제에 관해서 본의 아니게 일종의 제국주의자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라고 말하고 있다. 진보의 자기기만성에 대한 충고에는 일단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지적의 방식은 그 실효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사회의 모순을 구조적인 차원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비판하는 진보주의자가, 자신의 주 고민영역이 아닌 부분에서까지 일관되게 행동하기를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사람의 두뇌활동과 정서구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역행하는 무리한 주장 같기 때문이다. 즉, 페미니스트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게 해당 진보주의자더러 일상의 영역에서 뼈를 깎는 정치적 실천을 하라고 요구할 게 아니라, 우리 사회 일반의 젠더
인식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 큰 문제될 게 없지 않냐는 것이다. 모든 개체와 관계를 동등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과 각각의 개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차이의 정치학’은 서로 다른 게 아닐까.

반면에 얼마 전 ‘모색’의 편집장 오창은 씨가 학술단체협의회 측에 대해 “학술진흥재단의 학술지 평가와 그에 따른 지원으로 상징되는 제도화의 틀에 갇혀 시간강사 문제, 연봉계약제 등 대학사회의 합리화와 발전을 위한 주제들을 다루지 못하고 있다”라고 지적하는 건 수긍이 간다. 그것은 학단협의 고유한 역할에 대해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인신공격, 이념경직 부채질

인터넷이 발달하고, 정치적 커뮤니티들이 활성화되면서 이런 식의 건강한 비판문화는 좀처럼 자리잡지 못하고, 대신 인신공격성 비판이 난무하는 게 현재의 이념적 논쟁의 구도다. 익명의 글쓰기, 쓰는 족족 달리는 댓글 등 여러 특성상 인터넷 이념논쟁은 오프라인보다 훨씬 심각하게 이념 순결주의와 보혁간 대립을 부채질하고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특히 어떤 사안에 대해 개인이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노선을 정해, 실시간으로 서명을 받고 설문조사를 하는 식의 담론창출의 행위는 경직되면서도 동시에 내용없는 진보와 보수에 사람들이 끌려다니게 만드는 것이다.

진보 안의 보수와 보수 안의 진보를 고민하는 것은, 진보적 실천을 위한 화두를 찾고 새로운 연대를 모색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자신의 이념적 불균질성을 끊임없이 인식하게 하고, 그 결과물을 표현으로 이끌어내는 민주적이고 절차적인 의사소통구조를 확립하는 일과 가깝다.

최근 강금실 법무부장관이 조직 내에 안착한 개혁인사로 화제가 되고 있다. 강 장관의 특징은 “진보와 보수를 개의치 않는 사고의 유연함”에 있다고 얘기된다. “한총련 학생들의 5·18 시위 땐 비판적 언사를 서슴지 않았고 철도노조 불법파업 당시엔 공권력 투입 필요성을 주창”했지만 “준법서약서 폐지, 검찰 인사위원회 개편” 등의 개혁실적을 거뒀다. 이런 유연성은 정치경제적 영역을 넘어서서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해볼 때 생겨날 수 있다. 이와 관련 최근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라는 지식인 모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보의 여백을 넓히기 위해 종교와 영성을 진보의 영역에 끌어들이고자 한다.” 열린 태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강경보수에서 온건보수 쪽으로 이동하면서 이념적 다양성이 나타날 조짐이 보인다”라고 김영명 한림대 교수는 말한다. 그 다양성은 없던 게 생기는 게 아니라 기존의 진보와 보수에서 갈려 나오는 걸 게다. 학계의 역할은 그런 생각들을 분별해내고, 하나의 체계로 만들어 우리 사회의 이념적 다양성을 더욱 세련되게 추구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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