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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철학을 팝니다, 철학을 사세요
[학문후속세대의 시선]철학을 팝니다, 철학을 사세요
  • 교수신문
  • 승인 2020.07.2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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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재단 덕분에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지만 석사과정 내내, 어쩌면 박사과정 1년 차까지 내 가장 큰 걱정은 돈이었다. 인문대 대학원에선 수업 조교를 빼면 학교에서 월급 받을 기회가 거의 없다. 게다가 우리 학교 철학과처럼 대학원생이 많은 곳에선 머릿수에 비해 수업 조교 자리조차도 모자라다. 그래서 많은 대학원생들이 생계를 위해 학교 바깥으로 돈다. 철학과 대학원생들은 논술학원으로 곧잘 팔려간다. 그래서 논술학원 성수기인 10월에서 11월쯤엔 연구실이 텅텅 빈다.

나는 다른 일을 했다. 처음 찾은 일은 법학적성시험 추리논증 영역의 모의고사 문항을 만드는 것이었다. 추리논증 영역에는 철학 소재의 문항이 매년 여러 개 나온다. 때문에 학원가에서도 철학 소재 문항에 대한 수요가 존재한다. 추리논증 기출 형식에 맞추어 약 1,200자 분량의 문항을 작성하면 개당 대략 10만 원 전후의 돈을 받는다. 학원가 입장에서도 석/박사과정 대학원생은 썩 괜찮은 파트너다. 소재가 소재다 보니 다소의 전문성이 필요한데, 그렇다고 교수님을 문항 당 10만 원에 모실 순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이 일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논문과는 전혀 다른 제약 조건을 두고 글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문항을 제작할 땐 우선 응시자에게 배경지식이 전혀 없다고 가정해야 한다. 추론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에서 배경지식에 따라 어드밴티지가 주어져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출제자는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특정한 철학적 사고의 논리를 ‘1,200자 안에’ 전달해야 한다. 그러려면 가능한 한 직관적이고 간명해야 한다. 수식을 줄이고 의미가 분명한 개념어를 사용해야 한다. 논문은 작품이지만 문항은 상품이기 때문이다. 상품은 너절해서는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외에 다른 일도 한 적이 있었다. 철학을 주제 삼아 모임을 여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작은 강연인데, 내가 어떤 주제의 모임을 기획하면 다섯에서 열 명 사이 사람들이 매주 한 번씩 들으러 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이런 식의 소규모 강연 비즈니스에서 철학은 꽤 잘 팔리는 상품이다. 대학에서 소위 ‘인문학의 위기’ 때문에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 수는 줄어들더라도 교양 강의만큼은 꾸준히 열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구나 어쩌면 한 번쯤 생각해 봤을 만한 주제를 다루기 때문이며, 그래서 진입장벽이 상대적으로 낮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교양 강연 비즈니스의 주요 타깃은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직장인이다. 대학에서 교양 수업 듣던 감각을 아직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약간의 동경을 느끼지만 아쉽게도 이제는 졸업을 해버려서 거기 갈 수 없게 된 사람들이다. 하지만 직장을 구해서 그때 없던 구매력과 시간적 여유를 갖추게 된 사람들이다. (교양서적 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학생이었던 사람들이 이제 손님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때문에 강연 비즈니스에서 호스트의 역할, 그러니까 내가 했던 역할은 대학 강의에서 교/강사의 역할과 일견 비슷하면서 아주 달랐다. 정보를 전달하면서 재미를 놓치지 않아야 했다. 둘 중 하나만 잡아야 할 땐 재미를 잡았다. 학생과 달리 손님은 중간고사도 기말고사도 치르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든 원하면 수강신청을 철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근의 소위 ‘인문학 비즈니스’가 그럭저럭 유망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위에서 예시한 추리논증 문항 제작처럼 아주 구체적인 수요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최근의 나는 고등학교 국어영역 모의고사 출제 회사와 계약했다) 출판과 강연 시장에서의 수치도 나쁘지 않다. 최근에는 유튜브에서도 우후죽순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소수의 유명한 작가들이 파이를 사실상 독과점한 상태다. 나는 바로 여기에 우리 학문후속세대들, 대학원생들의 자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타깃 계층과 같은 세대와 문화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조성엽
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칸트 윤리학을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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