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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못 맡을까봐 만삭에도 이 악물고...
강의 못 맡을까봐 만삭에도 이 악물고...
  • 김조영혜 기자
  • 승인 2004.03.08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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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비정규직 여교수의 삶, 들여다보기

3월 8일은 ‘여성의 날’이다. 1908년 3월 8일, 미국의 여성섬유노동자들은 빵과 참정권을 요구하며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공황에 의한 경기침체로 생활고에 허덕이면서도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없음을 깨달은 여성노동자들은 참정권을 주장하는 한편, 과도한 작업량과 위험한 작업환경을 개선하고 산전산후 출산휴가 등 모성 보호조치 등을 요구했다.

현대를 사는 한국의 만 20세 이상의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등하게 보통선거권을 갖고 근로기준법에 따라 월 1회 생리휴가와 60일 이상의 산전산후 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법으로 보장된 권리들이 대학강단에서는 적용되지 않기도 한다. 비정규직 여교수들은 일용잡급직으로 생리휴가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산전산후 출산휴가가 보장되지 않아 만삭의 몸으로도 강단에 서야 한다. 비정규직 여교수들의 일상을 들여다보자.


“내가 여자라고 등록금을 덜 낸 것도, 공부를 덜 한 것도 아닌데, 여자라는 이유로 강의배정에서건 교수임용에서건 남자선후배에게 밀릴 땐 눈물이 나도록 서럽다.”

 

인터뷰 도중 한 비정규직 여교수는 대학사회에서 여자라서 차별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와락, 눌러왔던 화를 쏟아냈다. ‘따지기 좋아하는 배운 여자’라는 소리 안 들으려고, 참아왔던 이야기들을 봇물처럼 쏟아내는 여교수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돈 되는 강의는 남자선배에게 양보해라”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는 한 비정규직 여교수는 “학생이 많아 초과수당을 받을 수 있는 근현대사 강의를 조선사 전공인 남자 선배에게 주면서, 정작 전공자는 나 몰라라 하는 대학에 화가 나다가도 그나마 있는 강의도 뺏길까봐 항의도 못 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전공이나 실력과는 상관없이, 돈 되는 강의는 남자 강사들한테만 배정된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비정규직 교수 사회에서도 남자 교수는 가족의 생계를 짊어져야 하는 ‘가장’ 대접을 받는 반면, 여교수들은 부차적인 노동으로 취급받는 셈이다.

 

강의 10년차, 결혼 11년차의 다른 비정규직 여교수는 매학기 강의배정을 받을 때마다 “너네 집은 둘이 벌잖아”라는 말로 남자 선후배들에게 강의를 양보하기를 강요받는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발을 동동거리며 이 대학에서 저 대학으로 보따리 장사를 다녀봤자, 월수입 1백만원이 채 안되는 강사 주머니 사정은 매한가지인데 “남자여서 더 절박하다”는 동료들을 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고 했다.

 

어렵게 강의를 배정받고도 학기 도중 임신이라도 하면, 비정규직 여교수들은 난감해진다. 지난 겨울 첫 아이를 출산한 이 아무개 교수는 “만삭이라 서 있기도 힘들었지만, 임신했다고 강의를 쉬게 되면 다음 학기 강의를 못 맡을까봐 이를 악물고 강의했다”라고 말했다. 초중고 교사들은 임신하면 휴직을 신청하고 임시교사가 수업을 맡지만, 비정규직 교수들 사이에선 강의 중간에 다른 교수로 대체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결혼도 교수도 못 한 ‘집안의 천덕꾸러기’

 

취재 중 만난 비정규직 여교수들은 서른을 훌쩍 넘기고도 대부분 비혼이었다. 좋아하는 공부하다보니, 결혼이 뒷전으로 밀려서이기도 하지만, 한 여교수의 경험담은 충격적이었다. 선을 보러나가서는 “여자가 혼자 외국 나가서 공부하고 왔을 정도면 얼마나 독하겠냐”라며 딱지를 맞았다고 했다. 시어머니 될 사람은 “대학 나온 내 아들이 박사까지 받은 마누라 학비대줄 이유가 없다”라며 결혼을 반대했다.

 

마흔 나이에 친정 부모님과 함께 사는 한 비정규직 여교수는 “교수나 될까 해서, 참고 지켜봐온 부모님들도 나이가 들면서 결혼도 못 하고 교수도 못 된 딸을 집안의 천덕꾸러기로만 본다”라며 “안정된 수입이 없으니 독립할 수도 없고 공부에 전념하기도 힘들다”라고 털어놨다.

 

막상 결혼한 여교수들도 공부와 가사를 병행하기가 힘든 것은 여느 직장여성 못지않다. 11살, 7살 두 아이의 엄마이자 비정규직 교수인 박 아무개 씨는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서 우는 아이를 4학년 전공 수업에 데리고 가서 강의실 한 편에 앉혀뒀다. 엄마가 무슨 일 하는지 보여주고 엄마가 학교에 가지 않으면 형아, 누나들이 기다린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남자 교수들에게 집은 휴식공간이지만, 여자들에겐 가사노동과 육아가 남아있다. 잠자는 시간 빼고는 계속 일한다”라고 푸념했다.


“애 떼놓고 지방 내려와 가르칠 수 있어요?”

다른 비정규직 교수들과 마찬가지로 여교수들도 ‘정규직 교수’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한 지방대 총장이 신임교수 임용 최종 면접에서 던진 물음을 보면 비정규직 여교수들이 정규직 교수가 되는 길은 요원해 보인다. 한 때는 여대였다가 남녀공학으로 개편한 지방대 총장의 첫 질문은 “혼자 지방에 내려와 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결혼한 여자가 남편하고 아이들을 서울에 놔두고 내려올 수 있겠냐는 물음이었다. 그 여교수는 “당연히 제대로 공부하고 가르치려면 혼자 방 얻어서 살겠다”라고 답했지만,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인터뷰 중 만난 여교수들은 한결같이 “여전히 대학은 남자들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 틈새에서 살아남기가 힘들다”고 입을 모았다. 여자들이 조직 적응력이 부족해서 교수되기도 어렵다고 하지만, 학회에 가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세금내고 뒷정리하는 ‘회계’만 맡기고 “운영에 참여할 기회는 아예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다른 비정규직 여교수는 “아예 정규직 교수가 되길 포기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5~60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강박감이 들기도 한다며, 후배들이 공부하겠다고 하면 “너, 나를 보고도 그러니? 딴 길 찾아봐”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공부를 포기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한국철학을 전공하는 한 여교수는 “환경이 열악해서 그렇지, 공부가 참 재밌다. 이렇게 재밌는 공부를 두고 다른 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게 속상하다. 인문학은 마흔이 넘어야 학문의 깊이가 우러나는 법인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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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04-03-21 13:30:00
이효재 교수가 얼마전에 책을 냈다고 하지만,
그 남성중심 문화를 이루는 남성들의 아내는
뭐하나?. 집에서 낮잠만 자나?.

여성들도 남성과 결혼하거나 이해관계를
이루는 순간, 결국 남성의 기득권을 곧 자신의
기득권으로 간주,남성 중심 사회에
무비판적으로 손쉽게 동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잔인하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내가 볼때는 여성들의 가족중심적 이기주의가
더 잔인해 보인다.

이 점에 있어서는 전여옥이 여성의 이기주의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남자와의 불화를 청산했다"
고 선언한 전여옥은 우리 사회 대부분 여성들의
속 마음을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