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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의시간-‘讀書百遍義自見’
나의 강의시간-‘讀書百遍義自見’
  • 송재소 성균관대 한문
  • 승인 2004.03.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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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옛날 일만 생각한다더니 나도 환갑을 넘겨서 그런지 옛날이 생각날 때가 많다. 아마 앞으로 살아갈 시간은 짧고 지나온 시간은 길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지금처럼 모든 것이 무서운 속도로 변하는 시대에는 미래를 꿈꿀 겨를이 없다. 현재의 변화도 좇아가지 못하는데 어찌 미래를 그려볼 수 있겠는가.

 내가 대학에 다녔던 1960년대 초반의 풍경이 떠오른다. 그때는 개강일자가 따로 없었다. 학문 분야에 따라서 다소의 차이는 있었지만 인문학 분야의 학과에서는 학사력에 의한 개강일자로부터 약 1개월이 지난 후 담당교수가 강의실에 들어오는 날이 개강일이었다. “선생님 언제 개강합니까?” “개나리꽃이나 피면 시작하지” 대개 이런 식이었다. 또 휴강은 왜 그리도 많았던지. 심한 경우에는 한 학기에 서너 번 강의실에 들어오는 교수도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개강 첫날 첫 시간에 들어가지 않으면 학생대표가 연구실로 ‘모시려’ 온다. 이렇게 ‘향학열’에 불타는 학생들의 태도를 탓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어쩐지 씁쓸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각박하다는 느낌의 일단일 것이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는 선생님을 ‘교수님’이라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 불렀다. ‘교수님’은 직책명이지 존칭이 아니다. 자기를 가르쳐주시는 분에 대한 최고의 존칭이 ‘선생님’ 말고 무엇이 있단 말인가.

 

다행하게도 나는 1학년들에게 가르치는 기초한문 교재에 실린 韓愈의 ‘師說’을 강독하면서 ‘선생’이란 낱말의 뜻을 학생들에게 주지시킨다. 그리고는 이렇게 당부한다. “나는 교수님이란 말보다 선생님이란 말이 훨씬 더 정답게 들린다. 앞으로는 나를 선생님이라 불러다오. 만일 교수님이라 부르면 돌아보지도 않겠다.” 선생님이 교수님으로 바뀐 사실이 오늘날 사제간의 냉랭한 세태를 반영하는 것 같아 역시 씁쓸한 기분이다.

 “어떻게 해야 한문을 잘할 수 있습니까?” 학생들이나 일반인들로부터 자주 받는 질문이다. 그때마다 나는 “한문 공부에는 王道가 없다. 무조건 외워라”고 말해준다. 내 대답을 들은 사람들의 얼굴엔 불만의 기색이 역력하다. 암기식 교육이 지탄을 받고 있는 지금 무조건 외우라니 말이 안 된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인 것을 어쩌랴. 세상이 아무리 빨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 법이다. 말하자면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방식으로 해야 하는 것이 한문 공부이다. ‘讀書百遍義自見’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문 공부의 정도이다. 백 번을 읽으면 외워질 것이고 외워지면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는 것 이것이 한문이다.

 

그리고 누가 무어라 해도 모든 학습의 기본은 암기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특히 학부 학생들에게 되도록 많이 외우게 한다. 다행히 한문학과에서 한문 공부에 뜻을 둔 학생들의 경우, 내 방식을 따라줘서 대견한 생각이 든다.

 ‘讀書百遍義自見’식의 공부는 한문 학습에 유용할 뿐만 아니라 人性교육에도 매우 효과적이라 생각된다. 매사에 빠른 진행을 요구하는 이 속도전의 시대에 느긋한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참고 인내하는 것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커다란 미덕 중의 하나이다.

 

클릭하면 금방 나타나는 컴퓨터 화면에 길들여진 젊은이들의 행동양식은 즉흥적이고 충동적이다. 뜻을 알 수 있을 때까지 읽고 또 읽으며 참고 기다리는 이 공부 방법이 현대인의 조급한 病症을 일정한 정도로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한문학과 학생들을 칭찬하는 말을 다른 학과의 교수들로부터 종종 듣는다. 요사이 젊은이들치고는 매우 예의가 바르다는 것이다. 특히 내 친구들 중에는 한문학과 여학생을 며느리로 삼고 싶다는 요청을 많이 하고 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시대에 뒤떨어진(?) 나의 강의방식이 그래도 약간의 효과가 있는 것 같아 조그마한 보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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