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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論 : 임일환 교수의 서평(교수신문 2002년 4월 22일자)을 읽고
反論 : 임일환 교수의 서평(교수신문 2002년 4월 22일자)을 읽고
  • 정대현 이화여대 철학
  • 승인 2004.03.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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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다'와 '모를 수 있다'의 차이

2년 전 교수신문에 실린 임일환 교수의 서평에 대해 저자가 반론을 제기했다. 임 교수의 답변을 기대한다.

▲ © 리브로
임일환 교수는 필자의 저서('심성내용의 신체성', 아카넷 刊)에 대해 몇 마디의 격려 외에는  대부분의 지면에서 "등골에 으스스한 소름"이 난다는 날카로운 비판을 부드러운 어조로 발전(교수신문, 2002. 4. 22.)시키고 있다. 임 교수의 책의 이해와 비판의 논리에 먼저 주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를 따르는 모더니스트는 "내 마음 내가 모를 수 없다"라고 해 내 마음의 언어의 의미와 내가 가지고 있는 관념의 내용을 일치시킨다. 심리 언어의 데카르트적 의미론인 것이다. 그러나 정대현은 "내 마음 내가 모를 수도 있다"라고 해 내 마음의 언어 의미가 나의 관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속해 있는 언어 공동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김씨가 이씨를 질투한다는 것을 진솔하게 부인하지만 사람들이 그렇다고 할 때, 김씨는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경우가 된다는 것이다.

비생산적, 현학적인 철학적 고민일 뿐인가?

임 교수의 이러한 서술은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위의 서술을 근거로 이 책이 "혁신적, 비생산적, 현학적"인 철학적 고민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비판의 핵심은 다음의 인용문에 나타나 있다

"예컨대 모든 인간의 이마에 누구나 볼 수 있는 액정 표시판 같은 것이 달려있어서, 그 사람의 머리 속에 어떤 생각이 스칠 때마다 생각과 느낌과 욕구의 내용이 문자 그대로 TV 화면의 자막처럼 나타난다고 가정해보자. 예를 들어 철수가 배가 고픈 생각이 들면 철수 이마의 액정표시판에 '나는 지금 배가 고프다'라는 자막이 실시간으로 비춰진다. 자 가정 상, 모든 사람이 날 때부터 이런 액정 표시판을 달고 나온다면, 그런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가  바로 정 교수가 말하는 다른 사람들은 내 마음을 알지만, 나는 내 마음을 알 수 없는(왜냐하면 내 두 눈으로 내 이마의 액정을 볼 수는 없으니까) 그런 언어공동체일 것이다. 만일 그런 사회가 가능하다면, 분명 그 사회는 우리가 사는 이 현실 사회와는 전혀 상이한 사회일 것이다. 일상적인 '거짓말'이나 '음해'가 불가능한 사회, 정치적 사상 '검증' 자체가 불필요한 사회, 나아가 '프라이버시'라는 인권개념 자체가 발달할 수 없는 사회일 것이다."

임 교수가 구성한 가정 상황은 확실히 "등골이 으스스하게 소름"이 끼친다. 그러나 필자의 저서가 이러한 상상 상황을 함축하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임 교수는 함축한다고 생각하고 근거를 제시한다. "정 교수가 말하는 다른 사람들은 내 마음을 알지만, 나는 내 마음을 알 수 없는 그런 언어공동체일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임 교수가 들이대는 근거는 수용할 수 없다.

첫째, 임 교수는 "나는 내 마음을 알 수 없다"라는 명제 (1)을 필자가 주장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내 마음 나도 몰라"라는 필자의 구호를 임 교수는 그렇게 해석했을 수 있지만 그것은 필자에 대한 배려적 해석은 아니다. 필자는 논의의 문맥에서 언제나 "나는 내 마음을 모를 수 있다"라는 문장 (2)를 사용했다. 명제 (1)은 너무 강해 그 자체로 살아남을 수 없고 옹호할 수 있는 방식을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명제 (2)는 보다 약해 옹호 가능하다. 그리고 이를 지지할 수 있다면 "나는 내 마음 모를 수 없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 (3)을 반박하는 데 충분하다. 명제 (1)도 참이라면 명제 (3)을 반박할 수 있지만 그러나 명제 (3)보다 개연성에 있어서 더 떨어진다고 믿는다.

동일한 표현, 다른 의미로 사용

명제 (1)과 명제 (2)를 조금 더 대조할 수 있을 것이다. 둘 다 부정적 양상문으로 구성돼있다는 점에서 유사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초견적 인상일 뿐이다. 양자는 대단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나의 의식에 대해 내가 접근(인출)할 수 있는가에 대해 전자는 전면적 부정임에 반하여 후자는 의식의 접근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전자의 전면적 부정은 자기 의식마저 부인한다라는 함축을 시사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들은 의식의 접근성 뿐만 아니라 의식의 현상(직접)성에 접해 있다. 그러나 후자는 의식의 현상성을 부인하고 있지 않지만 전자는 부인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들을 누가 믿을 것인가.

둘째, 임 교수는 "다른 사람들은 내 마음을 안다"라는 문장 (4)를 필자가 사용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동일한 문장 (4)를 임 교수와 필자는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임 교수의 가정 상황에서 사람들은 내 이마 액정 표시판의 문장을 읽어 내 마음을 알지만, 필자의 가설에서 사람들은 나의 개체에서 발생하지만 심리언어의 사회적 의미론에 입각한 나의 몸짓을 표준으로 내 마음을 안다. 임 교수의 액정 표시판 문장의 의미는 명시돼있지 않지만 개인주의적이라는 인상이 짙다. 그러나 필자의 심리 문장의 의미는 사회적이다. 심리언어 의미의 사회성 가설이 정당하다면 인간 의식의 내용이 공동체 구성적이고 개인 존재가 인간 연대적이라는 것을 강하게 보인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고려대에서 '지식개념의 일상언어적 분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분석철학 전공자이면서 인문학 전반과 한국적 철학 관련 논문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맞음의 철학', '필연성의 문맥적 이해', '지식이란 무엇인가', '한국어와 철학적 분석'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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