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여년간 소나무 그림을 천착해온 김경인은 식물적 가치를 표출하는 대표적 화가로 인정받고 있다.(김경인 作, '삼송행', 유채, 211*219cm, 1995) © |
그것은 동아시아에 있어 전통적인 세계관, 우주관과 자연관을 다시 상기시킨다. 농경문화의 삶에서는 변화가 생명을 만드는 만큼 동아시아의 지성들은 변화의 원리를 체득하는 것이야말로 생존의 비결이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또한 생명의 본성, 자연의 이치 및 삶의 이치를 '식물성의 세계'를 통해 깨달았다.
修辭에 머문 식물성의 탐구들
사실 아주 겸허한 태도로 자연과 교호한다든지, '우주적 연민'(cosmic pity)의 정조로 모든 존재물을 성찰한다든지 혹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그 자체로 존중한다든지 하는 마음들은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 예술/미술하는 정신일 것이다. 미술이란 것도 결국은 뭇 타자들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관심을 기울이고 인간과 세계와 자연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의미있는 가치와 윤리, 생각을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동양적 자연관·우주관과 겹치는가 하면 생태학적 사고와 유사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서로 유기적 관련 속에서 진정한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자연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최근 생태와 환경, 생명을 이야기하고 이를 다루는 많은 작업들은 그런 주제의식을 다만 작업의 알리바이로, 개념적으로 그리고 슬로건화 하고 있을 뿐이다.
▲최혜인 作, '감자 속 사막', 순지에 채색, 72*50cm, 2000. © |
불교는 '내 것'에 대한 연기적 이해를 제시하면서 그 '내 것'이라는 것을 통해 '나의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즉 나는 변화하는 존재이며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는 존재이며 오직 타자의 전제 위에서만 존재하는 폭포수와 같은 의식의 흐름 덩어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불교의 생태이해가 연기 패러다임, 즉 나의 욕망 공간의 확장이 남의 욕망공간에 대한 장애(희생)를 최소화 내지 무화시키는 인식틀 위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런 마음이 화훼와 분재, 수석취미 및 사군자와 산수화를 그리거나 완상하게 한 동인이기도 했다. 동양미술이 바로 그런 마음에서 발현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동양의 전통적인 우주관, 예술관이 '존재의 사슬'이었음을 이해한다.
즉 전체적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가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그물로 짜여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근원적 세계관으로 나아간다. 근원적 세계관이란 바로 인간과 자연의 일체를 꿈꾸는 전체론적 사고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모든 생명이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 그리고 그 생명의 온전한 발현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인식은 동시대의 과학적 합리주의 세계관 내지 서구중심의 인식론적 패러다임과 그로 인한 모든 문화적 논리들을 새로운 방향으로 개선해나가는 데 중요한 사유의 단초를 던져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은 다분히 명목론적 구호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매우 일상적이고 '근사'적인 학습과 체험에서 비롯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 가장 단순한 실마리가 바로 식물이며 생태론적 시선이다.
생태주의는 '환경 속의 인간' 이라는 이미지를 거부하는 대신에 관계적이며 그물망적인 이미지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태주의는 인간이 모든 생명과 연합된 하나의 생명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관념에서 사물로 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고 괴로움이자 행동이며 그것이 곧 예술인 것이다.
근원적 세계관과 생태론적 시선의 의미
▲김주연 作, '異熟', 혼합재료, 설치, 2002. © |
반면에 기존의 생태와 생명, 식물을 다루는 그림들은 단순히 자연을 절대정신 및 대전제로 간주하고, 우리 인간을 큰 자아에 귀속된 작은 자아로 그리는, 환원주의적 태도를 견지해왔다. 즉, 일반적인 공식을 특수한 상황에 적용시켜버리는, 윤리적 목적에 갖다 바치는 작품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결코 자연은 자원도, 신비화할 정신도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연이 끊임없이 緣起하는 그 움직임에 동참하는 일밖에는 없다.
결국 미술/그림이란 것 역시 자연의 형식과 조응하는 몸의 형식을 드러내는 하나의 틀이다. '내'가 자연을 전용,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변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자연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유기성 안에 살고, 우주의 미로 안에 살아있는 유기적 인간의 본래적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미술은 바로 그러한 변형의 역할 속에 있다. 그러니까 그림 그리는 이는 관찰과 함께 '행'한다. 그 '행'함을 미술의 형식이라고 불러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인식 속에서 우리는 새삼 격물치지라는 것, 그리고 식물적 사유와 동시대 미술의 의미를 엮어나가는 한 단초를 만들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박영택 / 경기대·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