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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형, 보직형일수록 심해…가족관계 '아슬아슬'
연구형, 보직형일수록 심해…가족관계 '아슬아슬'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4.02.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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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기획: 교수사회 '일중독' 설문조사

우리 신문은 올 한해 교수사회의 노동강도를 지속적인 기획으로 점검해나갈 계획이다. 그 첫 번째 순서로 교수들의 일중독 현상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접근해봤다. 전문가가 마련한 일중독 자가진단리스트를 총 22명의 활동가, 저술가 교수가 응답을 했는데 그 결과는 매우 심각했다. 총 83%가 일중독인 것으로 드러난 것. 그 현황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질문문항을 통해 살펴보고, 교수사회 일중독의 원인 및 의미 등을 짚어보기로 한다.

▲지식인 사회에서 일중독 현상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가들은 이를 개개인의 심리성향과 교수사회의 특이한 경쟁구조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한다. © www.cartoonistonline.com
활발하게 활동하는 저술가, 활동가 교수 22인을 선별해 ‘일중독 자가진단’ 설문지를 돌린 결과, 총 22명 중 19명(83%)이 일중독에 걸려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통용되는 ‘일중독’이란 용어가 병명이라기보다 현상을 부르는 파퓰러한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된 것으로 알려진 교수집단에 이렇듯 일중독 현상이 심한 것은 그 원인과 의미를 따져보기 전에 충격을 던져준다.

응답교수 중 83%가 일중독

설문지는 알콜중독, 인터넷중독, 섹스중독 등 각종 중독의 심리현상을 전공, 연구하고 있는 최은영 칼빈대 교수(상담심리)가 교수들의 생활양태와 자신의 임상경험을 토대로 만든 것이다. 총 24문항 가운데 YES로 답한 숫자가 많을수록 일중독 수치가 높아지는데, 응답결과를 분석해보면 18명의 일중독 교수 가운데, ‘아주 심한 일중독’(19~24, 이하 A형)과 ‘조금 심한 일중독’(13~18, 이하 B형)이 9명, ‘약한 일중독’(8~12, 이하 C형)이 10명으로 나왔다. 그 외 3명은 일중독이 아니었지만 일중독 수치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일중독을 나타낸 19명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분석해보자. 연구?강의와 관련된 9문항으로 교수들이 노동하는 시간, 심리적 압박감 등을 체크했다. B형의 교수들은 평균 7개 문항(78%)에 대해 일중독 관련 증세를 나타냈다. C형 교수들은 5문항 정도 압박감을 갖는 것으로 나와, 일중독이 연구, 강의준비와 상당한 관련성을 갖는 것으로 볼 수 있었다.

모든 중독증이 그렇지만, 특히 ‘일중독’은 주변인들과의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일에 빠져드는 시간’은 필연적으로 다른 시간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분석결과 일중독으로 인해 가장 많이 피해를 보는 건 가족들이었다. 총 19명 중 10명의 교수가 주말에도 가족보다는 연구에 시간을 쏟아 붓고 있었으며, 평소에도 가족과의 대화가 적어 가족들로부터 불만을 사거나 소외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A형과 B형에 해당하는 9명은 정도가 매우 심각했는데, 대부분이 가족관계를 묻는 질문 9문항에서 7문항(78%)이나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냄으로써 가족관계가 평탄치 못하다는 것을 드러냈다.

일중독 교수는 개인적인 여가나 취미활동도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4개의 질문으로 취미생활, 여가시간 활용, 심리상태 등을 물어봤다. B형에선 오로지 1명만이 제대로 된 취미생활을 하고 있었고, 4명은 개인시간을 어중간한 형태로 보내고 있었다. 반면 C형 교수들은 10명 중 8명이나 취미?여가생활에 충실한 것으로 나타나 가족과의 시간보다는 개인적 휴식이나 여가로 중독을 푸는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보직형 교수 스트레스 많이 받아

그렇다면 교수들의 일중독 현상은 성장기 때 부모나 선생으로부터 성공에 대한 압박감을 받으며 자란 생활습관과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응답결과를 보면 ‘성공에 대한 압력을 받고 자랐다’라고 답한 이들은 19명 중 총 8명으로 나와 그다지 큰 변수는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마음 터놓고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없다’라고 말한 이들도 7명이나 됐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 분석결과 일중독 정도가 심한 A, B형 교수들 가운데 연구형, 사회활동형, 교내봉사형 교수로 나눠볼 때 사회활동형 교수가 단 한명도 포함돼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외부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과 일중독 현상은 별개의 문제임을 짐작케 한다. 설문조사 결과 가장 심한 수치를 기록한 교수는 학내에서 보직을 맡고 있는 교수였는데, 학내 업무가 꽤 많은 스트레스의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도 외면할 수 없는 측면인 것 같다.

사실 교수사회의 노동 강도가 세다는 건 그동안 꾸준히 지적돼온 문제다. 이번 설문조사는 워콜릭 교수들에 대한 지엽적이지만 상징적인 표본을 드러냄으로써, 일중독이 연구여건의 열악함이나,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우리 사회의 높은 요구 등 구조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지식인 개개인의 심리적 성향과도 결부돼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생활인으로서 좀더 양질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면에서 자신이 어느 상황에 처해있는지 끊임없이 체크하고 조절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으로 보인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설문조사에 응해주신 분들)

고갑희 한신대(여성학), 김대식 서울대(물리학), 김동민 한일장신대(신문방송학), 김상환 서울대(철학), 김성국 부산대(사회학), 김연철 고려대(정치학), 김준형 경희사이버대(교육학), 민경국 강원대(경제학), 송영출 광운대(경영학), 심성보 부산교육대(교육학), 이동철 용인대(철학), 이수자 경희대(여성학), 이시재 가톨릭대(사회학), 이재룡 숭실대(불문학), 이진우 계명대(철학), 임석재 이화여대(건축학), 정정호 중앙대(영문학), 정진상 경상대(사회학), 정태욱 영남대(법학), 조 은 동국대(사회학), 최병두 대구대(지리학), 한인희 대진대(중국학)(이상 총 22명, 가나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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