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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녕왕과 무령왕릉
무녕왕과 무령왕릉
  • 교수신문
  • 승인 2020.07.13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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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 『무녕왕과 무령왕릉』을 말한다.
무녕왕과 무령왕릉
무녕왕과 무령왕릉

 

글_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융합고고학과 교수)

왜 ‘무녕왕’인가?

책 제목이 『무녕왕과 무령왕릉』이니 당연히 ‘녕’과 ‘령’의 차이에 대한 의문이 일어날 것이다. 음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활음조 현상을 적용한 게 ‘무령왕’ 표기였다. 그러나 국호나 역사적 인물의 이름은 기능성을 배제해야 본디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가령 ‘契丹’에 대한 ‘거란’ 표기는 한국에서의 변형된 발음이다. 거란 스스로 키탄(Khitan) 또는 키타이(Khitai)로 일컬었으니 한자음 그대로 ‘계단’으로 읽을 때 ‘키탄’과 연결된다. 따라서 정체성이 담긴 국호나 인명은, 발음의 편의를 위한 기능성 문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반면 ‘무령왕릉’은 사적 제13호인 송산리 고분군에 소재한 능묘의 공식 표기를 따랐다.

검게 그을린 듯하고 톱니 같은 무령왕릉의 쪼개진 관재.
검게 그을린 듯하고 톱니 같은 무령왕릉의 쪼개진 관재.

 

무녕왕을 만나게 된 인연

저자가 무녕왕을 만난게 된 계기는 대학 때 국문학과 과목인 ‘현대소설강독’을 수강하면서였다. 사학과 학생인 저자는 역사소설을 집필하기로 했다. 백제 성왕의 비극적인 최후를 소재로 잡았다. 성왕의 아버지인 무녕왕의 생몰 기간이 확인되면 아들의 출생 시점도 가늠할 수 있다. 다행히 무녕왕의 연령은 1971년에 발굴한 왕릉 부장 매지권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는 523년에 62세로 사망했으니 462년 출생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무녕왕을 기준으로 『삼국사기』에 적힌 그 이전 왕들의 출생 연령을 살펴보니 5대 간에 겨우 57년 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1세대 간 소요 시간이 11년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일은 가능할 수 없었다. 백제 왕실 계보에 고장이 붙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과연 백제 제25대 무녕왕의 아버지를 『삼국사기』에서는 제24대 동성왕,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신찬」에는 곤지, 『일본서기』 본문에는 제21대 개로왕이라고 했다.

무녕왕의 아버지에 관한 서로 다른 3가지 기록이 전해왔다. 저자가 대학시절에 고찰한 결과 무녕왕은 동성왕의 아들이 아니라 이복형으로 밝혀졌다. 다른 기록이라면 모르겠지만,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일차 조건인 혈통에 관한 오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백제 초기 기사도 아니고 5~6세기에 활약했던 국왕의 혈통이 잘못 기재되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둘러붙일 것도 없이  『삼국사기』의 증거 능력이 대단히 취약하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폭로한 것이다. 

무녕왕은 이복동생인 동성왕이 정변에 의해 피살된 후 불혹에 즉위했다. 동성왕이 피살되지 않았다면 백제 역사상 무녕왕은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격동의 시기에 간난을 몸소 체험하고 즉위한 무녕왕의 삶 자체가 백제 역사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니 무녕왕을 보면 백제가 보인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무령왕릉에 부장되었던 명문이 있는 2개의 은팔찌 가운데 하나. 당연히 손목에 낄 수 있다고 여겼지만, 낄 수 없었다. 관념의 허구를 벗겨주었다.
무령왕릉에 부장되었던 명문이 있는 2개의 은팔찌 가운데 하나. 당연히 손목에 낄 수 있다고 여겼지만, 낄 수 없었다. 관념의 허구를 벗겨주었다.

 

무녕왕에 대한 대장정

대학생 때 저자가 구명한 무녕왕의 계보를 근거로 한성 도읍기 말기부터 웅진성 도읍기 격동의 백제사를 재조명할 수 있었다. 저자의 논지는 석사학위 논문의 핵심 골격이 되었고, 『한국사연구』 45집(1984)에 수록된 이후 인용이 잇따랐다. 득의에 찼던 저자는 처음으로 일본열도를 밟았을 때 무녕왕의 아버지인 곤지를 제사지내는 아스카베 신사를 찾았었다. 신사의 안내판에는 제신을 ‘백제 곤기왕昆伎王’이라고 했다. 왕을 칭했던 곤지는 남중국의 유송으로부터 정로장군 좌현왕에 임명된 최고 실력자였다. 이후 저자는 곤지가 형인 개로왕의 임신한 여인을 데리고 일본열도로 항진하던 중 해산했다는 섬도 두 차례나 탐방했다. 중국의 난징 등 무녕왕과 직간접으로 연관된 유적까지 죄다 답사하였다.

남은 과제들       

무령왕릉은 도굴되지 않았고, 또 주인공이 알려진 유일한 백제 왕릉이었다. 게다가 내년은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그럼에도 풀어야할 숱한 수수께끼가 남아 있다. 가령 처녀분임에도 불구하고 금송으로 만든 관재가 빼개져서 파편이 연도까지 날라와 뒹굴었다. 무엇으로도 구명이 어려운 팩트 자체였다. 그리고 잘못 알려진 사실도 정정이 필요해졌다. 2개의 은팔찌는 그 안에 새겨진 명문 때문에 왕비가 생전에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제는 손목에 끼울 수 없는 구경 5.2cm에 불과했다. 20년 전에 KBS 다큐물 인터뷰를 위해 무령왕릉 모형관에 갔을 때였다. 동일한 크기의 은팔찌 모형이 있었기에 한번 손에 넣어 보았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은팔찌는 순전히 부장용임을 알 수 있었다. 무녕왕의 신원을 알려주는 석판은 지석誌石이 아니었다. 묘터를 토지신에게 구입한 사실을 적어놓은 토지 매입 문권이었으니 매지권이 맞다. 매지권 명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동일한 전축분이었기에 선후 관계가 애매했던 송산리 6호분의 조성 시기와 피장자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가능해졌다. 그 밖에 왕과 왕비의 시신이 모셔진 빈전으로 알려졌던 정지산 유적의 기능도 재해석했다.

출생에서부터 곡절이 많았던 무녕왕은 사후에 묻힌 유택과 그 안에 부장된 유물들도 숱한 비밀을 품고 있었다. 본서는 저자가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어언 40년간 추적했던 무녕왕과 무령왕릉 연구의 총결산이다. 그렇지만 부드럽게 읽히게 할 목적으로 에피소드를 많이 담았다. 끝으로 무령왕릉은 우연한 발굴이 아니라 예측했던 발굴임을 증언을 통해 최초 공개했다. 이렇듯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내용이 넘친다. 본서의 독보적인 가치는 이러한 점에서도 유효하다고 자평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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