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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논단-한국대학 위기의 뿌리
교수논단-한국대학 위기의 뿌리
  • 홍가이 경성대
  • 승인 2004.02.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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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가이 / 경성대 디지털디자인대학원 초빙교수 ©
대학이라는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교수들이다. 학생들이야 캠퍼스에서 4년이 지나고는 졸업해 나가지만, 교수들은 10년이고 20년이고 대학을 지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어떤 대학이고 그 교수 집단이 그 대학의 핵심 요체요, 정신적 지주요, 성격자체를 결정 지워준다. 따라서 어떤 자질의 어떤 지적 성향의 교수들이 모였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게다가 교수집단의 문제는 곧 한국 대학의 위기로 직결될 수 있다.

 

최근 한국 사학의 최고 명문으로 꼽히는 대학에서 교수들의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 대학에서조차 비리가 발생한다면, 다른 많은 한국의 대학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짐작할 만할 것이다. 심지어 대학 교수직이 사고파는 흥정의 대상이라는 것도 알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뉴스에 보도되는 개별적인 비리들은 사실 빙산의 일각으로 근원적인 문제는 아니다.  좀더 근원적인 문제가 한국대학 위기의 암세포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우선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대학 교육이라는 것에 대한 이념적인 이해가 잘못 돼 있다. 왜곡된 평등주의와 서로간의 경쟁심과 질투심으로 똘똘 뭉친 한국의 부모들은 옆집 자식이 대학 가는데 우리 집 애들도 가야지하고 생각한다. 이런 국민들의 정서를 익히 잘 아는 정치인들은 인기 영합주의의 일환으로 수많은 대학을 인가하고 기존의 대학에는 정원수를 2배, 3배로 늘려 고등학교 졸업생은 누구나 최소한 어떤 한 대학에는 들어갈 수 있도록 됐다. 왜 이렇게 대학이 많을 필요가 있을까. 또 모든 사람이 대학을 다녀야 할 필요가 있을까. 왜 모든 대학이 동일한 입학전형을 해야만 할까. 입학전형의 표준화도 결국은 한국식 평등주의 정서 때문은 아닐까. 

 

갑자기 많은 대학이 생기면서 그만큼 더 많은 교수들이 필요해져, 자질을 검토하기도 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대학 교수가 됐다. 전문적인 교육이나 자질이 검증되지 않았어도, 아무 대학에나 대학교수로 채용돼 교수님 소리를 듣게 되면, 오히려 애초부터 없는 전문성이 갑자기 부여되고, 정부에서 선심정책으로 나오는 각종 국책사업이나 막대한 정부 기금 운용에도 참여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자리 잡은 교수들은 새 교수들을 뽑을 때, 자기보다 실력이 더 있는 사람은 임용에서 제거했다. 이유는 자명하다. 실력 있는 교수들은 자기들의 무능력을 단번에 노출시킬 것이니까. 그것을 사전에 방지하자는 속셈일 것임 역시 자명한 것이다.

 

결국, 우리 한국 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구조조정이 산업에서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아니 대학가에서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국의 수많은 대학의 수를 절반이하로 줄이고, 프랑스처럼 대학교수임용을 고시제로 하면 어떨까. 

 

또 하나의 근원적인 문제는 한국 대학들이 독특한 교육철학이 없이 서구의 대학조직과 교과 과정을 무비판적으로 그냥 베껴왔다는 것이다. 또 학문적으로 기술적으로 한국의 교수들은 아직도 자기 스스로의 철학을 학문을 전개하기 보다는 서구의 그것을 소화하는 데 급급하고 있다. 이점은 보수도 신좌파도 마찬가지다. 둘 다 서구의 담론을 거칠게 직수입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의 지성과 도덕과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교수는 아직도 한국의 대학가에 등장하지조차 않은 것은 아닐까. 그런 상태에서 대학이란 잡화상식 지식 전달 시장 그 이상이 될 수 있을까. 암담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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