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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33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33
  • 김용준
  • 승인 2004.02.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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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공동성명 발표하던 겨울, 그 무렵

<다시 한번 말합니다. 자주도 평화도 통일도 다 민중의 손에 있지 다른 어떤 것의 손에도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지 않은 것은 설혹 하늘에서 왔다 해도 참이 아닙니다. 받아서는 아니 됩니다. 자주의 자(自)는 곧 민(民)이지 관(官)이나 군(軍)이나 그밖의 아무것도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링컨의 유명한 말을 알지 않습니까?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정부"라는 말. 설혹 민중에게 해가 아니되더라도 민중의 손으로 된 것이 아니고 누가 가져다 씌우는 통일이면 통일이 아닙니다. 민중 자신밖에 자신을 대신할 놈이 천지간에 없으니, 또 민(民)의 민(民)됨이 자유함에 있으니 스스로 민(民)의 손으로 아니한 것이면 해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사실은 시대는 늘 민중이 먼저 아는 법입니다. 민심-천심 사이에 직통전화가 있습니다. 서울·평양 사이에 직통전화 놓는대봤자 민(民)의 입과 귀는 가닿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 이상 믿을 것 없습니다. 민중이 소위 당할 뿐인 것입니다. 이때까지의 잘못은 다 용서하더라도 앞에 것은 감시해야 합니다. 종을 감시 아니하는 주인은 종과 주인을 다 망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정말 눈을 똑바로 뜨고 일해야 합니다. > (전집: 8-51)

위에 소개한 함 선생님의 글은 1972년 6,7월 합병호의 2페이지에 발표된 '南北統一原則合意 共同聲明에 對한 聲明'이 개재된 바로 다음 페이지에 실린 '僞善하는 國民'이라는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위의 '聲明'에 저 유명한 1972년 7월 4일의 '南北統一原則合意 共同聲明'에 대한 당시 일반에게는 그 존재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았던 '民主守護國民協議會' 대표위원의 명의로 1972년 7월 5일자에 발표된 성명서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這間 政權의 非常事態宣言과 그에 따른 過剩團束으로 善良한 市民들의 눈과 입과 귀가 가리워진 가운데 이루어진 南北間에 統一原則合意에 關한 共同聲明이 4건 突然히 發表되었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聲明한다.
1) 祖國의 平和統一은 民族의 熱火같은 所望이다. 따라서 우리는 統一을 前提로하고 南北間의 緊張狀態를 緩和하기 爲한 交流의 開始를 支持한다.
2) 祖國의 統一을 爲해서는 思想과 理念 制度의 差異를 超越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人間의 自由와 尊嚴性을 基礎로하고 民族의 實 인 民衆의 參與가 前提되어야 한다.
3) 政權間의 利害得失에 얽히어 民族分斷을 永久化하는 結果를 招來하지 않도록 嚴重히 警戒해야 한다.
4) 交流와 會談을 앞두고 民衆의 自由意思表現을 抑壓하는 非常事態에 關한 特別措置法 國家保安法, 反共法 및 其他 關係法令을 廢棄 또는 修正하고 아울러 非想事態宣言을 撤回할 것을 거듭 要求한다.

1972년 7월 5일

民主守護國民協議會

代表委員 金 在 俊/代表委員 李 丙 璘/代表委員 千 寬 雨/代表委員 咸 錫 憲

요사이  나는 가끔 함 선생님이 지금 살아 계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생각을 가끔씩 하게 된다.
혼란의 극을 치닫고 있는 오늘이라는 현실 속에서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선생님의 글과 당시 발표된 성명서를 그대로 여기에 옮겨보았다. 독자 여러분에게 참고가 될 것을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지난 1월 14일 아침에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인 현역학(玄永學)선생이 별세하였다. 시내 모 일간신문에는 '민중신학자 玄永學교수 별세'라고 보도하면서 "1970년대 한국기독교회의 갱신과 민중신학 운동에 힘쓰는 한편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했다"라고 그를 소개하고 있다. 그가 구한국말기부터 일제시대에 거쳐 우리나라 근대사에 많이 회자되는 윤치호(尹致昊)씨의 사위라는 사실도 밝혀두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내가 여기서 현영학 교수를 거명하는 것은 70년대 초의 나의 삶에 큰 계기를 마련해 준 분이기 때문이다. 그를 알고 나서 지금까지 내가 구독하고 있는 '과학과 종교'에 관한 계간지 'Zygon'지를 나에게 처음으로 소개해준 이도 바로 현영학 교수였다. 그를 알게된 것은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1978년 정월에 있었던 한국기독자교수 협의회의 년회 세미나에서였다. 이런 단체가 있는 줄도 모르고 '현대과학과 신학'이라는 발제강연을 한 그 모임에서 나는 일약 이 모임의 중앙위원으로 천거되었고 그 다음 해인 1969년에는 현영학 교수가 회장으로 그리고 내가 총무를 맡게 된다. 현영학 교수는 대학을 일본에서 다녔고 그 후 바로 도미하여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일찍이 1950년대 후반부터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의 기독교계를 잘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은 연유로 그는 회장직을 맡고 있는 동안에 미국의 아시아 기독교 고등교육재단(United Board for Christian Higher Education in Asia)에 연구프로젝트 신청을 해놓고 있었으나 그가 회장직이 끝날 무렵에야 미국의 재단에서 3천불이라는 연구비가 지급되는 바람에 결국 1971년에 내가 회장직을 맡게되어 이 연구비를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화 3천불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여기서 새삼 1971년 당시의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을 상술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다만 1971년이 저무는 12월 초에 전국의 대학·교무위원급 교수 수백 명이 숙명여대 강당에 모여 당시 문교부장관인 민광식 씨의 사회로 당시 중앙정보부 제8국장 강인덕씨의 시국강연을 듣던 기억은 생생히 남아있다. 그때 들었던 강연내용이 무엇인지 기억하지도 못하고 또 기억할 필요도 없지만 나는 그날밤 강연회가 끝난 다음 숙명여대 정문에서 남영동 큰 도로까지 도보로 걸어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삼켰던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어떻든 전국 대학의 수장들을 모아놓은 자리에 대제학이라 할 수 있는 문교부장관의 사회하에  중앙정보부 일개 국장의 강연을 꼼짝 못하고 듣고 나와야 하는 당시의 고려대학교 교무위원의 초라한 내 모습이 참담하기가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아마도 12월 6일 비상사태 선언의 전야제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와 같은 와중에도 1972년 1월28부터 30일까지 '씨알의 소리'지 제1차 독자수련회가 2박3일로 안양농민교육원에서 실시된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독자 90여명과 전 서울시장 김상돈, 이태영 전 이대 법대학장 정준하 전 국회의원 김지하 시인, 재일 퀘이커 대표로 마틴 코빈 씨 그리고 멀리 미국에서 퀘이커 대 국회 활동위원회 명예총무인 레이몬드 윌슨 박사가 초빙강사로 참석하는 등 당시의 정부 당국에서 볼 때는 그야말로 눈에 가시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모임에서 함 선생님은 '세계 평화의 길'(전집 13:275)이라는 주제강연을 하셨고 윌슨 박사는 '평화를 위한 국제정치'·'미래의 미국 대 아시아 정책'이라는 두 번에 걸친 초청강연과 안병무 박사는 '평화를 위한 종교', 김동길 박사는 '평화를 위한 교육'이라는 발제강연을 하였다.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수련회가 열렸다는 자체가 대단한 항쟁이었다고 말해서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 고려대학교 공학부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던 나는 이 모임에 적극 참석치 못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3년 간의 교무위원 시절에 매일같이 거의 자정 가까이 되어야 귀가할 수 있었던 사실이 당시의 긴박한 사회의 실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런 와중에서 나는 한국기독교자교수 협의회 회장으로서 연구프로젝트의 수행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군대 제대후 거의 실직상태에 있었던 재학시절에 고려대학교 기독학생회 회장직을 맡고 있었던 정상복 군을 파트타임 간사로 채용하였고 사무실은 한국기독교학생운동 총련맹 사무실을 빌려쓰기로 하고 주로 정상복간사의 활동으로 전국 각도에 기독자교수협의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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