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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유내강의 삶...국어 운동의 꿋꿋한 실천가
외유내강의 삶...국어 운동의 꿋꿋한 실천가
  • 권재일 서울대
  • 승인 2004.02.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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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허웅 선생을 기리며

권재일 / 서울대·언어학

지난 1월 26일, 국어학계의 큰 별, 허웅 선생이 국어 사랑의 깊은 뜻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그 무렵 오랜만에 포근히 눈이 내렸다. 산에 온통 눈이 덮혔다. 눈 쌓인 산, 바로 허웅 선생의 호 '눈뫼' 그대로였다.


선생의 삶은 우리에게 빛을 던져 주는 큰 별과 같았지만, 화려하지는 않았다. 늘 생각하는 바를 묵묵히 실천하는 삶이었다. 그리고 한결같이 너그러움을 지녔다. 누구나 선생을 처음 대하면서 느끼는 것은 그 밝은 얼굴에 묻어나는 너그러움이다. 좀 뒤쳐지는 제자가 있어도 기다려 준다. 그러나 당신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선생 말씀대로 표현하자면, 원고지 한 장 한 장 쓸 때마다 ‘피를 말리는’ 열정과 엄격함으로 그 많은 학문적 업적을 이뤄 냈다. 이렇듯 선생은 안으로는 엄격하면서 밖으로는 너그러움을 지닌 삶을 살았다.

"한 나라의 말은 그 나라의 정신이다"

선생의 우리말 연구는 전적으로 민족 문화를 잇고 가꾸는 데서 시작한다. 청년시절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을 처음 대하면서 선생이 나아가야 할 앞길을 결정한다. ‘한 나라의 말은 그 나라의 정신이며, 그 겨레의 문화 창조의 원동력이다’라는 생각을 일찍이 품었다. 우리말을 민족 정신과 문화의 뿌리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선생 학문의 바탕이 됐으며, 평생을 일관되게 지녔던 학문적 태도다.


그래서 선생 학문의 성격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연구’와 ‘실천’, 둘의 조화라고 하겠다. 선생의 학문은 국어 연구를 언어과학으로 승화시켰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어를 지키고 가꾸는 실천 운동을 전개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국어를 객관화시켜 과학적으로 연구만 하고 국어 운동의 가치를 무시하는 학문 태도, 학문적 바탕없이 맹목적으로 국어 사랑을 외치는 국어 운동의 태도, 선생은 이 둘을 평소 가장 경계했다. 그러한 면에서 선생은 탁월한 학문 업적을 남긴 국어학자이자, 우리 민족 문화의 바탕을 꿋꿋하게 지킨 국어 운동의 실천가였다. 우리가 선생을 존경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학자적인 자세 때문이다.


선생의 학문 업적은 크게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로는, 국어를 연구하기 위한 이론의 토대를 마련한 업적이다. 1960년대에 지은 저서 '언어학개론', '국어음운학'을 통해 국어 연구에 필요한 언어학 이론을 수립했다. 외래 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이를 독창적인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실제 이 저서에 힘입지 않은 국어학자가 없을 정도로 국어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둘째로는, 국어 자료를 바탕으로 국어의 참모습을 밝힌 업적이다. 15세기 우리말 체계를 세우고 이 체계에 따라 옛 말본 연구를 집대성해 '우리 옛 말본'(1975년)을 펴냈다. 선생은 이를 바탕으로 한편으로는 우리말의 역사를 추적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20세기 우리말을 연구해 왔는데, 그 결실은 '20세기 우리말의 형태론'(1995년), '20세기 우리말의 통어론'(1999년)이다.


이러한 선생의 학문에는 우리말 존중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국어 연구의 근거를 우리말 사랑과 존중에 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의 학문은 이론적으로 선각자들의 정통적 학문을 계승하고 있다. 주시경 선생에서 비롯되고, 최현배 선생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연구 방법을 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정통성의 계승에 그치지 아니하고 독창적인 이론 체계를 수립했다. 앞 시대 연구를 계승해 이를 독창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학문의 가장 올바른 태도라 믿었다. 또한 주어진 이론틀에 따라 국어 자료를 해석하는 연구 방법이 아니라, 실증적 자료를 바탕으로 국어 구조에 맞는 이론틀을 마련하는, 국어 연구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했다.

글자 생활의 민주주의 실천

선생의 국어 운동은 국민의 글자 생활은 한글만으로, 언어 생활은 쉽고, 바르고, 고운 말로,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말글의 가치를 높이 받드는, 국어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활동이었다. 특히 국어 순화의 올바른 방향을 이해하기 어렵거나 불필요한 한자말, 외래말을 쉬운 한자말이나 토박이말로 고쳐 쓰는 것으로 잡았다. 모든 한자말과 외래말을 토박이말로 고쳐 쓰자는 것이 아니라 무분별하게 쓰는 한자말, 외래말을 우리말로 다듬어 쓰자는 것이다.

선생이 주창한 '한글은 우리 겨레와 민중을 위한 글자로 태어난 것이다'라는 생각은 글자 생활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한 정신이다. 한글만 쓰면, 읽기에 좀 불편한 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모든 국민들이 모두 편하게 글자 생활을 하며 모두가 문화와 정보를 누릴 수 있게 되지만, 한글-한자를 섞어 글자 생활을 하면, 일정한 교육을 받은 지식층만이 문화와 정보를 누리게 된다는 점에서 한글만 쓰기를 주창한 것이다. 이것이 곧 글자생활의 민주주의 정신이다.


선생의 국어 사랑의 삶과 학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그리고 이 땅을 이어갈 후손들이 우리 말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깨우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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