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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출판동향 : <기억의 터전>(피에르 노라 지음, 갈리마르출판사 펴냄, 1992)
해외출판동향 : <기억의 터전>(피에르 노라 지음, 갈리마르출판사 펴냄, 1992)
  • 이용재 서울대
  • 승인 2004.0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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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기억 속 담긴 민족정체성

프랑스의 역사가 피에르 노라(Pierre Nora)가 기획한 '기억의 터전Les Lieux de m moire'이 완간된 지 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 '기억의 역사'는 위기에 처한 현대 역사학의 새로운 전망을 여는 핵심 분야로 자리잡고 있다. '공화정'(1권, 1984), '국민'(3권, 1986), '프랑스들'(3권, 1992)이라는 부제를 달고 십여 년에 걸쳐 차례로 선보인 이 책은 우선 총 7권, 6천여쪽에 걸쳐 130여명의 전문 역사가들이 동원된 방대한 규모만으로도 현대 역사학의 기념비라 할 만하다.

출간 당시부터 '역사학의 혁명'으로 받아들여진 《기억의 터전》은 실로 눈부신 성공을 거뒀다. 사전에도 실린 이 책은 이제 학계의 유행 담론이자 일상어로 쓰이고 있으며, 갈리마르 출판사의 현직 편집장인 노라는 일약 프랑스학술원 회원으로 선임되는 영예를 안았다. 영어판과 일어판에 이어 현재 중국어 번역이 준비중인데, 독일에서도 이에 견줄만한 '독일의 기억의 터전'이 선보인 것을 계기로 나라마다 유사한 연구를 자극하고 있다.

10여년에 결쳐 완성된 역사학의 기념비

왜 '기억의 역사'인가. 과거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생활 공간에서의 의사소통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승된다. 그러나 개개인의 과거 기억이 모두 역사의 지평에 자리잡는 것은 아니다. 기억의 역사화는 항상 망각을 동반하는 선택적 작업이다. 한 사회에서 무엇이 기억되고 무엇이 잊혀지는가는 미래에 일정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현재의 문맥에서 과거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결정된다.

다층적인 기억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 다투는 가운데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일정한 정체성과 귀속감을 형성하는 특유한 집단 기억, 즉 '기억의 문화'가 형성된다. 이러한 문화적 기억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공민 교육, 기념비, 기념식 등 유형·무형의 제도적 기제를 통해 전승되면서 항상 현재적 문맥에서 재구성되며 이를 통해 해당 사회의 형성과 유지에 이바지한다.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이 성립한 이래 기억과 역사는 줄곧 갈등을 빚어왔으며 싸움의 승자는 늘 역사 쪽이었다. 기억이란 느슨하고 임의적이며 주관적이란 점에서 현대 역사학이 추구하는 합리성, 객관성, 과학성과는 어긋나는 것으로 평가절하됐다. 그러나 여기서 노라는 기억과 역사의 이분법을 지양하고 상보적인 성격을 부각시킨다.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서 역사가 기억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며 결국에는 역사도 사라져 가는 기억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기억의 테마가 역사학의 전면에 대두하게 된 것은 지난 1970년대 이후 프랑스 사회를 몰아친 정치적·경제적·이념적 격변과 혼미 속에서 과거의 전통적 가치관과 단절된 채 기약 없는 미래를 향해 내던져진 프랑스인들이 겪은 심각한 정체성 위기의 소산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역사의 의미가 상실돼 가는 현대 사회에서 '기억의 터전'을 찾아 나섬으로써 기억과 역사의 변증법적 연관성을 탐구하는 작업이 노라의 기억의 역사학이다.

▲피에르 노라 ©
노라는 우선 <한 공동체가 지닌 기념 자산의 상징적 요소들, 즉 국민적 기억이 구현되어 있는 터전들>을 찾아 나선다. 노라가 건립한 프랑스인의 기억의 전당에는 왕, 귀족, 노동자, 종족, 정치 파벌, 이민자 등 '인적' 차원과 지형, 기념비, 동상, 시청, 종루, 성당, 성지, 도서관 등 '사물적' 차원은 물론이거니와 기념제, 언어, 國歌, 國是, 풍물, 길 이름, 순례 등과 같은 '상징적' 차원 그리고 기념일, 법전, 문학 작품, 공증인 문서, 가계도, 문서고, 사전, 역사학 등 '기능적' 차원까지 무려 1백30여 품목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다.

여기서 우리는 프랑크족과 골족의 투쟁에서 대독 항전파와 협력파까지, 노트르담사원에서 에펠탑까지, 클로비스의 대관식에서 라마르세유까지, 나폴레옹 법전에서 현대 아날학파까지 2천년 프랑스사의 영고성쇠를 간직한 장구한 국민적 기억의 파노라마를 두루 살펴볼 수 있다.

기억과 역사의 화합 도모한 메타-역사

그러나 '기억의 터전'에서 노라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작업은 단순히 사라져 가는 프랑스인의 국민적 정체성을 새삼 일깨우는 일이 아니라 지금까지 민족의 영광과 긍지를 앞세우며 기억에 대한 담론을 독점해온 획일적인 민족 서사시를 넘어서서 역사와 기억의 화합을 담보할 수 있는 참된 민족(국민)사(histoire nationale)를 확립하는 일이다.

따라서 '기억의 역사'는 과거의 사건들 그 자체에 대한 연구에 관심을 집중하기보다는 그 사건들이 이후 사회 구성원들의 집단기억 속에 줄곧 반추되면서 선택과 배제의 논리 아래 일정한 역사상을 형성하는 상징 기제들에 시선을 돌린다. 노라가 역사학 자체를 '기억의 터전'에 포함시켰다는 사실은 '기억의 터전'이 기왕의 역사서술을 비판적으로 점검하고자 하는 일종의 '메타-역사'임을 보여준다. 기억과 역사의 화합을 도모하는 역사학, 자기 자신을 기억의 일부로 성찰하는 비판적 역사학인 것이다.

과거의 영광에만 머물지 않고 화합의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진정한 국민 정체성의 모색, 노라의 표현을 빌자면 '민족주의 없는 국민정체성의 역사' 서술은 가능한가. 이제 우리도 열린 마음으로 한민족의 '기억의 터전'을 찾아 나서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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