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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부른 훈수보다 꼼꼼한 책읽기부터
섣부른 훈수보다 꼼꼼한 책읽기부터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01.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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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비평의 조건: 저자들에게 듣는다

교수신문은 지난해 중반부터 본격서평이란 타이틀 아래 비판적 서평을 시도해왔다. 내용소개는 될수록 줄이고 대신 논점을 뽑아 분석, 비판을 강화했다. 적극적 대화의 방식이었으나, 자칫 책의 전모에 대한 균형적 이해에 소홀할 수 있었다. 이 서평에 대해서 비판을 받은 당사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지난 6개월간 서평면에 올랐던 저자 9명과의 인터뷰로 이 궁금증을 풀어봤다.

*응답자: 강문구, 복거일, 박길성, 박상진, 선우현, 윤구병, 윤택림, 조정환, 천정환

지난 6개월간 교수신문 서평면에 올랐던 저자 9명과의 미니인터뷰로 비평후 독후감을 들어봤다. 저자들의 대답은 우리 시대 비평의 기준을 가늠하기 위한 쌍방향 통로가 돼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비평글이 전문성, 성실성, 공정성, 밀접성(텍스트와 저자에 대한 애정), 콘텍스트성(현실이나 학술적 흐름 속에서의 평가) 등 5개의 기준에 얼마나 부합했는지 솔직한 답변을 부탁했다. 총 9명 가운데 1명은 수긍한다, 6명은 매우 불만족스러웠다, 2명은 무난했으나 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견해를 밝혔다. 전체적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먼저 불만족의 극치를 살펴보도록 하자. ‘죽은 자를 위한 변명’(들린아침 刊)의 저자 복거일 씨가 첫머리에 올 것이다. 좀 길지만 인용해본다.

결점찾기 위주의 난도질을 해서야

“서평의 첫머리에 내 책이 ‘혹세무민’한다고 썼던데 한숨과 함께 인격적인 모욕을 느꼈다. 똑같이 비판적이긴 했지만 ‘문화일보’ 서평은 솔직한 맛이라도 있었다. 박 교수의 글에서 내가 느낀 건 철벽 같은 기득권자의 논리다. 한국사학계는 도그마로 꽉 차 있다. 그가 인용자료의 오류를 지적했지만, 모든 센서스는 오류가 있다. 그리고 내가 인용한 총독부 자료가 당시로선 공식자료였다. 이걸 무시할 수 있나. 그리고 텍스트를 넘어선 감정적인 공격도 군데군데 보였다. 내가 반론 같은 걸 잘 쓰지 않는 이유다.”

복 씨는 혹평을 당한 심정을 그대로 털어놨다. 여기서 귀담아들을 건 월장하는 비평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사실 책에 대해 청탁자도 선입견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그러니 ‘철벽’이라고 느꼈으리라. 하지만 인용자료에 대한 박 교수의 지적은 자료내용의 사실여부 자체를 문제삼은 게 아니라, 그 자료가 잘못된 시대적 선후관계 속에서 파악됐다는 것이었다. 그런고로 이 부분은 서평의 내용에 대한 정확한 답변이라고 볼 수 없을 듯하다.

또 다른 불만을 살펴보자. 자신의 저작 ‘위기 시대의 사회철학’(울력 刊) 서평에 대해 반론을 보내왔던 선우현 청주교대 교수다. 그는 질문항목에 맞춰서 답변을 보내왔다.

“서평자의 학문적 역량은 충분하지만, 외적인 이유로 전문적 식견이 발휘되지 못했다. 꼼꼼한 읽기가 없이 비판이 제기됐기에 외견상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데 급급했다. 서평자의 철학적 세계관에 입각해, 부합하는 것은 우호적으로, 벗어나면 좋지 않게 평가했다. 텍스트에 대한 애정은 고사하고 저자에게 한 수 가르치겠다는 식의 결점찾기 위주의 난도질을 했다.”

표현이 좀 강한데, 준 만큼 되돌려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서평자가 저자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을 버려라”는 충고가 특히 와 닿는다. 이런 게 느껴지면 “평자의 말이 부분적으로 맞고, 또 저자의 한계가 분명할지라도 그걸 겉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속내도 보여줬다.

‘인류학자의 과거여행’의 저자 윤택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는 “청탁을 잘못 한 것 아니냐”는 질책과 함께 “두권의 책을 한꺼번에 다룬다는 것은 사실상 무리”라고 지적했다. 그 이유는 서평자가 책의 핵심인 구술사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지 못할 전공영역이라는, 윤 교수의 덧붙인 말에서 찾을 수 있다. “내용도 4대 일간지에 실린 서평들을 읽으면 쓸 수 있는 수준이었다”는 지적은 신랄하다. 윤 교수는 “‘역사비평’에 실린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 이신철 박사가 비판을 많이 했지만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라고 밝혔다. “나는 구술사의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이다. 이게 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양사 하는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해서 놀랐다”고 말을 맺었다.

‘아우또노미아’의 저자 조정환 씨는 서평에 대한 인상을 넘어, 매우 분석적인 답변을 보내왔다. 우선 전문성 부분에서 “철학을 연구하는 전문가답게 다뤘지만, 그것이 서평자로 하여금 책의 내용에 깊이있게 접근하지 못하게 한 요인이었다”라고 말했다. “평자의 글은 개괄적 소개와 논평, 두 부분으로 이뤄졌는데 뒷부분은 책 내용이 분석되거나 비판된 게 아니라 그냥 서평되고 있었다. 서평자의 철학적 방법론(매개론, 변증법)과 철학적 태도(비판적 거리두기라는 보편 아카데미즘), 철학적 진리론(부분적 진리관)을 선언하고 있었다”라는 부분도 귀에 들어온다. “그리고 서평을 위해 텍스트가 놓여진 맥락은 사회정치적 맥락이 아니라, 서평자가 갖고 있는 철학적 관념체계라는 맥락이었다”라는 의견을 보였다.

이상에서 냉정하게 지적되고 있듯 평자의 자아가 돌출하는 서평은 그 말이 맞고, 설득력이 있을 지라도 서평으로서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 씨의 언급은 단순히 실증적 오류를 짚는 차원이 아니라, 철학적 분석을 통해 비평으로까지 나아가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제대로 된 서평이 얼마나 고급한 작업인지를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난해함을 독해하려는 열의 부족

서울대에서 일년 동안 강의한 내용을 묶은 ‘있음과 없음-존재론 강의’(보리 刊)를 펴낸 윤구병 씨는 서평자인 김상봉 문예아카데미 원장에게 반론 성격의 편지를 보내왔다. 평자의 두가지 지적이 잘못됐다는 내용인데, 그 기반에는 정독해도 알까말까한 책을 정독하지 않아 저자의 중요한 주장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원망이 서려있다. 지면관계상 글의 가장 중심 대목만 인용해본다.

“‘있음 바로 그것’, ‘없음 바로 그것’은 플라톤의 ‘이데아’나 헤겔의 이른바 ‘순수유’, ‘순수무’처럼 직관의 대상이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은 거의 상식에 가까운 말이고, 왜 그런지 자세하게 풀이까지 해 놓았는데, 그 부분은 건너뛰고 읽었는지, 알면서도 일부러 논쟁하려고 거는 말인지, 정말 모르는지 선생님의 짧은 단평만으로는 알 수 없었습니다.”

윤 씨는 대학원에서 이 주제로 꼬박 1년을 강의했는데 알아듣는 학생들이 없자 농담 삼아 “한 삼백년 뒤에 異人이 나타나면 그제서야 알아 들을라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지적 긴장을 요구한다는 의미다. 이런 책은 미국의 ‘뉴욕 리뷰 오브 북스’처럼 서평자에게 1년 정도의 시간은 제공해야 할 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어렵다면 과연 그게 진리로 입증이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다. 책이 어렵다는 지적에 대해 저자들은 귀를 열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근대의 책읽기'의 저자 천정환 박사는 자신의 책에 대한 교수신문 서평이 "책을 절반만 읽고 쓴 글임이 틀림없다"라고 말했다. 평자는 이 책이 식민지적 근대성을 그리 중요한 변수로 보지 않는다고 비판했는데, 이에 대해 천 박사는 "책의 뒷부분에서 왜 그 시대 사람들은 일본책들을 많이 읽었는가"란 질문을 중심으로 해서 그 문제를 다뤘다고 반박한다. 그리고 대중이 처음으로 탄생한다고 말하는 책에게, 대중으로만 시대를 이해하려 한다고 타박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고 항변했다.

‘한국민주화의 비판적 탐색’(당대 刊)의 저자 강문구 경남대 교수가 보내온 소감은 그나마 다행스럽다는 느낌을 안겨줬다. “비판의 요지가 비교적 핵심이 맞는 것 같고, 내가 보고 있는 시민사회론의 한계를 정확하게 얘기해 유익했다”라고 말하니 말이다. 강 교수는 다만 “반론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아쉬웠다”라며 서평문화의 미흡함을 타박했다. 그는 “국내 서평의 경우 평자가 자기 이야기를 위주로 열거하는 사례가 많아, 저자나 제3자의 개입을 통해 논의를 생산적으로 이끌 필요가 있다”라며 ‘비평 지면’ 운용의 묘가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텍스트를 넘어서는 논의는 非禮

박길성 고려대 교수는 자신의 책 ‘한국사회의 재구조화’(고려대출판부 刊)에 대한 서평에 대해 “우선 글이 매우 성실했다. 페이지에 대한 언급도 구체적으로 하고 있어서 신문 서평치고는 내용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이뤄졌다고 본다”라고 격려성의 메시지를 던져줬다. 그리고 “공정성 부분도 비평자의 논의에 근거해서 책의 장점과 단점을 최대한 표현하려고 애를 쓴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전문성 부분에서는 약간 아쉬웠다고 밝히는데, 그 이유로는 비평의 내용들이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진행되지 않고, 단편적으로 도출되고 있었다는 점을 들었다.

‘에코 기호학 비판’(열린책들 刊)을 펴내 국내학자로는 드물게 외국석학을 정면비판한 박상진 부산외대 교수는 서평 일반에 대해 “시원하게 긁어주는 비평이 필요하다”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서평과 반론은 치밀하고 꼼꼼해야한다. 저서와 서평을 넘어서서 괜한 말들을 늘어놓는 것은 실없는 장난”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서평에 대해서는 반론도 필요하지만 저자에게 ‘보충논의’의 기회를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짚었다. 평자와의 대화가 아니라 평자의 서평에서 미처 짚어지지 못한 부분을 밝혀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는 취지로 말이다. 아무튼 텍스트에 충실해달라는 저자들의 이런 종류의 생각은 대체로 지배적이고 완강하기까지 하다. 학계가 지나친 텍스트주의에 매몰돼온 것이 그간의 현실이었는데, 그래도 텍스트의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저자들의 불만은 비평의 전문성, 성실성, 공정성에 맞춰져 있다. 이 가운데 전문성은 편집자의 몫이다. 적절한 필자를 찾는 일이니 말이다. 그리고 성실성의 여부도 대개 편집자에 달려 있다. 하지만 공정성 및 논의 전개 방식에서의 문제는 고스란히 서평자들의 몫이다. 다소 감정도 섞인 우리시대 저자들의 불만에 대해 비판을 가한 입장에서 한번쯤 귀를 열어도 좋을 듯하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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