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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좋은 글'을 위한 각서
학이사: '좋은 글'을 위한 각서
  • 이강래 전남대
  • 승인 2004.0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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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래/ 전남대 한국고대사

어쨌든! 어김없이 새해의 걸음은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나는 학생들에게 "좋은 글 많이들 쓰시라" 한다. 범상한 덕담으로 들어 넘긴다 탓할 일 아닌 것이, 과연 '좋은 글'이란 어떤 것인지 스스로 몽매한 까닭이다. 그렇다고 하여 나나 그들이나 글을 비켜 둔 채 달리 갈급한 어떤 덕담이 따로 있으랴.

언제부턴가 새해 벽두에는 올 한 해 동안 '써야 할' 것들을 헤아려 보는 버릇이 생겼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글발께나 오른 이처럼 비쳐질지 모르나, 정녕 그건 아니다. 대개는 덩달아 동원된 노역이거나 어쩌다 생긴 빈틈을 메꾸는 숙제거리일 뿐이다. 설사 작심한 전공 논문이라 해도 따지고 보면 그 작심조차 순연히 내가 선구한 것은 아니었기 일쑤다. 요컨대 나는 얼추 만만치 않은 목록들을 무구한 열의로서가 아니라 번거로운 빚으로 여겨 우울하게 점검하는 것이다.

아마 이 우울함의 연원에는 내가 전공하는 상고사와 사유하는 현실의 상이한 원심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무력감 또한 큰 몫으로 자리하고 있음에 틀림없겠다. 대학원생 시절 은사 한 분은 저서의 서두에서 연구실 밖의 소란에 각별한 번민을 토로하였다. "나의 이 책이 저 단호한 구호 앞에 무슨 의미로 다가설 것인가." 천 년 너머 거슬러 올라간 시기의 건조한 역사물들과 80년대 초 학생들의 푸른 외침의 서슬은 서로를 용이하게 허용하지 않는다. 반면에 두터운 화강암 건물 벽은 그들의 투쟁 구호가 연구실의 서상을 발랄하게 어지럽히는 것을 막아내지 못한다. 그 격절의 가운데에 서서 은사는 곤혹스러웠던 것이다.

기실 시절이 바뀐다 하여 해소될 격절은 아니었다. 3년 전 '교수신문'은 내 책을 들어 "투입된 노력에 비해 판매량이 적어 마음고생이 컸다"고 한 출판인의 말을 인용했다. 한동안 동료들은 '가장 안 팔리는 책'으로 선정된 사실이 무슨 명예나 되는 양 즐거이 거론했으나, 내 마음고생이 어찌 그 분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을 것인가. 악연은 되풀이되어 작년에 '교수신문'은 다시 내 책을 일러 "학자들은 물론 독자 대중으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있는 상황"이라 한다. 기자는 물론 "이는 우리의 학문 연구가 기형적으로 성장해 왔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했으나, 송구하게도 나는 전혀 위로를 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쯤해서 나는 마땅히 '좋은 글'의 정체를 둘러싼 몽롱한 浮游를 멈춰야 옳다. 그것은 내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의 언표 하나가 삶의 좌표로 착근하고 말았다는 옛 제자의 고백에서 발견하는 놀라움, 그리고 이어지는 두려움과도 같을지 모른다. 말하자면 '좋은 글'의 실체란 애써 눈길 주지 않으려 하나 끝내 뚜렷하기만 한 무엇, 곧 너나없이 '나다움' 그것이라고 짐작해본다. 그리하여 새해에는 이런저런 인연과 학문을 빙자한 방어 논법에 얽매어 늘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이었던 나만의 속내를 방자하게 풀어내리라 마음 다진다. 아득한 상고사가 나를 구속한 것이 아니라, 내가 상고의 적요함에서 안온함을 찾았다는 반성에서 비롯한 다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의 이 각성이 오늘날 이른바 '인문학의 위상'에서 강요된 열패감과 무관하다고 확신하기는 힘들다. 예컨대 잠시 머물렀던 외국의 대학 도서관에서 효용 가치가 없는 책으로 분류되어 폐기되는 책들 가운데 알만한 同學의 저서를 발견하고 황급히 거둬 '구출'했던 경험이, 뜻밖에도 오늘의 각오를 예비한 것은 아닌지 자신하지 못한다. 맥락은 다르나, 해가 바뀌는 어간, 연구실 환경 정리차 서가에서 밀려나 연구동 수거함에 버려지는 책들도 고려했을 것이다. 대저 '쓸 데 없는 책은 없다'는 고루한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나는 정작 버려진 책보다는 그 책에 手記된 저자의 헌사에 더욱 상심하고 만다. 이렇게 보면 여전히 위기에 처한 것은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학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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