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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로또, 인생역전의 위기구조
문화비평: 로또, 인생역전의 위기구조
  • 장석만 종교학
  • 승인 2004.02.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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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일어난 일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게 바로 로또 열기다. 로또가 다른 복권과 다른 점은 우선 엄청난 당첨 금액, 그리고 자신이 숫자를 고른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키며 지속적인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자기가 능동적으로 선택해서 행운을 ‘쟁취’할 수 있다는 점은 로또의 환상을 부풀리는데 주도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이는 마치 우리가 TV드라마보다도 라디오의 이야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장면을 모두 보여줌으로써 상상력의 활동을 제한하는 TV와 달리, 라디오는 청취자가 자신의 취향대로 장면을 꾸미도록 환상의 공간을 마련해준다. 이처럼 로또는 구매자에게 6개 숫자를 선택하도록 해, 자신이 행운을 얻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개입을 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게 한다. 구매자 자신이 나름대로 인과의 연관성을 상정하고, 사물의 진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로또는 呪術과 닮아 있다. 주술을 행하는 자는 자신이 효과적이라고 상정한 사물 간의 연관 법칙을 바탕으로 해, 바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때문이다.

주는 복을 그냥 ‘받는’ 게 아니라, 복이 나에게 올 수밖에 없도록 한다는 로또의 주술적인 측면은 구매자로 하여금 다양한 당첨 전략을 상상케 한다. 그리고 이런 상상의 공간이 부풀면 부풀수록 로또에 대한 관심은 증폭된다. 주술적인 방식으로 숫자를 선택함으로써 당첨 번호를 쟁취하려는 구매자의 전략은 다양하다.

우선 하나의 번호에 집착하는 유형이 있다. 예컨대 자신 혹은 배우자의 생일이나 나이 등을 조합해 하나의 번호를 만들고 계속해서 여기에 승부를 거는 것이다. 한 가지 숫자 조합 자체에 신비로운 힘이 내재돼 있다고 믿고 언젠가 그 효력이 발휘될 것이라는 점을 의심치 않는다.

현대 자본주의와 呪術의 매혹

또 다른 유형은 숫자 자체가 아닌, 숨겨진 행운의 징조를 찾아내는데 진력하는 경우다. 그 징조가 드러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면 바로 돈벼락을 맞게 되는 셈이다. 통상적인 예는 길몽이나 초자연적 계시에서 행운의 징조를 찾는 것이다. 이 경우는 행운의 숫자를 직접 알려고 하는 대신, 그 숫자로 인도할 행운의 맥락을 탐색한다.

사후적 정당화, 그리고 과학의 권위

간혹 첫 번째와 두 번째 유형이 중첩돼 나타나는 때도 있다. 꿈이나 신적 계시에서 선명하게 본 숫자가 당첨 번호라고 하더라는 경우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당첨되고 난 후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행운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게 대부분이다.

세 번째 유형은 행운의 맥락이 아닌, 숫자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첫 번째와 같지만 과학의 권위를 동원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여태껏 당첨된 번호를 살펴 가장 당첨될 확률이 높은 번호의 조합을 찾으려는 경우다. 이른바 독특하게 작용하고 있는 확률의 법칙을 발견해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확률이란 필연성이 아닌, 일정 범위의 개연성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당첨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그 '단조로운 집착'의 사냥터

이렇게 ‘복을 쟁취’하려는 로또의 구매 열기에 대해 많은 이들이 걱정하며 도박 중독과 비교하곤 했다. 하지만 로또와 도박은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다. 도박이 ‘모 아니면 도’의 극한적 흥분을 즐기고 이런 흥분의 강도가 점점 높아지는데 반해, 로또는 습관처럼 비교적 소량의 금액을 매주 반복적으로 거는 특징이 있다. 도박이 ‘올인’의 엑스터시를 즐기면서 파멸의 구렁텅이에서 한 가닥 은총의 손길을 기다린다면, 로또는 어느 정도 자기 통제를 하며 ‘혹시 모를’ 행운의 ‘호랑나비’를 위해 조그만 거미줄 치기를 습관화하는 것이다. 천당과 지옥을 왕복하는 도박 중독에 비하면, 로또는 상대적으로 ‘단조로운 집착’이라 할 만하다.

로또의 구호가 ‘인생역전’이라는 점에서 잘 나타나듯, 로또의 열풍엔 이미 인생 구석에 내몰린 이들의 초초함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4백만이 넘은 신용불량자는 그만큼 정상적인 상태가 중지된 한국사회의 범위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바람은 더 이상 삶의 평온한 유지가 아닌, 갑작스런 삶의 변화다. 이미 불행으로 반전된 인생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선 또 한번 행운의 반전이 필요한 것이다.
로또 구매자는 인생의 반전을 위해 ‘복을 쟁취’ 하려 애쓰지만, 성급한 열정에 빠지지 않고 비교적 냉정을 유지하며 주기적으로 기회를 노리고 있는 돈벼락의 사냥꾼이다.  

장석만 /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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