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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윤리에 터한 학술논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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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명규 서울대
  • 승인 2004.01.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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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학술아젠다 선정의 의의와 과제

박명규/서울대 사회학

지식인 사회에서 아젠다를 선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학계가 선정한 10대 학술 아젠다' 기사를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물음이다. 아젠다라는 개념을 토론을 거쳐 결정을 보아야 할 현안이라는 의미에서 파악한다면 학술활동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주요한 사회적 쟁점일수록 정해진 시간 안에 결정될 수 없고 학술활동 역시 의사결정을 위한 한시적 토론과정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 시기 우리 사회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될 쟁점들을 확인한다는 포괄적인 뜻에서라면 충분히 의미가 있을 듯싶다. 사회적 쟁점을 확인함으로써 지식인들의 연구관심이 특정한 주제를 중심으로 결집되며 공동연구를 뒷받침할 수 있다. 또한 학술행위가 현실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시공간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자각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현실적합성 높은 지식체계 확보해야

그렇다 하더라도 지식인들이 선정한 아젠다가 일반인 내지 정치인들의 관심사와 어떤 점에서 차별화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문제다. 지식인으로서의 자질이 반드시 탁월한 현실판단력에 있는 것이 아닌 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의 선정에서 지식인이라고 특별한 의견을 지니기 어렵다. 실제로 공교육의 정상화, 정치개혁, 노사관계, 빈부격차 해소 등은 많은 매체나 정책관련 기관들에서 이미 숱하게 언급된 것들이며 어떤 점에서 보편화된 현대사회의 쟁점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아젠다의 선정 자체보다도 그 현상에 대해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가 더욱 중요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된 아젠다들의 경우에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 새로운 논의와 토론이 가능할 수 있으며 일반시민이나 정치인의 관심과는 다른, 지식인만의 학술적 문제제기가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학술아젠다의 설정을 통해 얻고자 하는 목표도 즉각적인 효용성을 지닌 정책창출이 될 수는 없다. 아마도 한국의 현실과 유리되지 않은, 현실적합성이 높은 지식체계를 확보하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아닐까 싶다. 지식의 '현실적합성'은 지식인의 정치적 태도나 참여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바탕에 작동하는 사회적 변인들을 인과적으로 드러내는 엄정한 지식체계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지식은 집합적 삶에 대한 이론적, 개념적 이해의 깊이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정책에 대한 찬반, 문제해결을 위한 정답찾기를 추구하는 일은 실제 그 효과도 의심스럽거니와 자생적 지식생산체계의 구축에도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오히려 눈앞의 효용성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진 시공간 감각을 바탕으로 할 필요가 있다. 역사와 구조, 그리고 개인적 삶의 상호연관성을 설명할 상상력을 지닌 학문을 요청하였던 밀즈의 구상이 오늘 학술 아젠다 설정을 통해 우리가 구축하려는 지식체계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탐구적 윤리, 지식인의 현실인식 기반

한국사회는 지식인의 현실발언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대중적으로 소비하는데 매우 빠르다. 정치개혁의 필요성이 강조될수록 예비정치인력의 대상으로 교수집단이 늘 주목을 받게 된다. 지식인의 사회적 영향력이 크다는 점은 긍정적인 효과 못지 않게 지식인의 정체성 상실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요한다. 진지한 탐구행위 자체는 중시하지 않으면서 지식인의 이름으로 정치적 주장이나 파당적 요구를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연구자의 직업적 윤리문제를 진지하게 따져 물었던 막스 베버의 논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실에 개입하는 종교인과 정치인의 상이한 태도를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로 구별했던 그는 동기의 순수성과 결과에 대한 책임성과는 별도로 학자에게는 요구되는 또 다른 차원의 윤리적 태도가 있다고 본 듯하다. 그것은 사회적 현상의 인과적 연관을 이해하려는 연구자로서의 성실성인 바, 특정 현상을 그 종국적 수준에까지 파고들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의미를 파악해내려는 독특한 태도이자 정신이다. 바로 이 정신이 종교적 사유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근대학문을 독립시켜주는 핵심이자 자기정체성이기도 하다.

지식인의 현실인식이 그 나름의 독자성을 가질 수 있다면 바로 이런 탐구적 윤리에 기초함으로써 가능하다. 교수도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지만, 적어도 학계의 존립형태는 그런 활동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적 정신과 그로부터 산출되는 지식체계에 바탕을 둬야 한다.

지식인으로서의 탐구정신에 철저하려는 내면적 윤리에 복종할 때만 사회구성원의 삶을 풍요롭게 할 창조적 지식생산이 가능할 수 있으며 그 속에서 바람직한 문제해결의 실마리도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아젠다를 점검하는 일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과 함께 이뤄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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