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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0]여성의 정치 참여 부르짖은 아나코 페미니즘 창시자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0]여성의 정치 참여 부르짖은 아나코 페미니즘 창시자
  • 박홍규
  • 승인 2020.06.24 1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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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미셸

자유주의 교육 받고 파리에 진보적인 학교 세워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사회주의 자치 정부 수립

유형지에서 아나키즘 받아들여 모든 정부 거부
유럽 전역에서 자본주의·권위주의 국가 공격
루이즈 미셸 초상화

파리의 지하철에는 ‘루이즈 미셸’역이 있다. 74년 전인 1946년 5월 1일 메이데이에 그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몽마르트르 언덕에는 ‘루이즈 미셸’ 광장도 있다. 그곳에서 올려다보면 하얀 대리석의 사크레쾨르 대성당이 있다. 2010년에 만들어진 프랑스 영화 <반역자 루이즈 미셸>(Louise Michel, la rebelle)은 미셸이 파리코뮌 참여로 유형을 받아 1873년부터 뉴칼레도니아에서 산 7년을 다룬 영화다. 그 영화는 우리 텔레비전에서도 상영되었으나 우리에게 그녀는 아직도 잘 모르는 사람이다.

‘프랑스의 아나키 할머니’, ‘몽마르트르 언덕의 붉은 처녀’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진 루이즈 미셸은 하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프랑스 북동부에서 조부모에 의해 길러진 그녀는 자유주의 교육을 받고 마을의 교사가 되었으나 자유로운 수업 방식으로 여러 학교에서 쫓겨났다. 1865년에는 파리에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학교를 세웠고 빅토르 위고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시를 발표하면서 급진적인 정치에 관여했다. 1869년 페미니스트 단체에 참여해 소녀교육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몽마르트르 언덕은 화가들의 동네로 우리에게도 유명하지만 화가들이 모이기 전에 그곳은 파리코뮌의 여성 지도자 루이즈 미셸(1830~1905)이 코민시민군을 이끌고 정부군에 대항한 곳으로 더 유명했다.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자 종군 노동자들이 250개의 대포를 그 언덕으로 옮겼다. 노동자들은 전후 집권한 보수 정권에 불만이 가득했다. 보수 정권의 군대가 그곳을 탈환하려 하자 마흔한 살의 여성 루이즈 미셸이 이끄는 2백여 명의 여성들이 3천여 명의 정부군 병사와 대치했다. 정부군 장군은 발포를 명했지만 병사들은 거부하고 도리어 여성들을 얼싸안았다. 그것이 파리코뮌의 멋진 시작이었다. 민중들이 처음으로 세운 사회주의 자치 정부인 그것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노동자 계급의 자치에 의한 민주주의 정부로 평가된다.

프랑스 제5차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파리코뮌에서는 노동자를 위한 갖가지 개혁이 이루어졌다. 1일 10시간 노동과 야간 노동 금지, 그리고 프랑스 최초로 노동자 상해보험이 시행되었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 교육은 교회에서 보통 사람들에게 옮겨졌고 모든 교회가 민주적 토론 장소로 사용되었다. 세계사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책들을 실행에 옮긴 파리코뮌은 그 뒤 사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1871년 3월 28일 파리코뮌의 성립이 선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군이 코뮌을 진압하기 위해 파리로 진입하게 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정부군이 완전히 파리를 탈환한 5월 25일 이후 열흘 동안 파리에서 2만 5천 명이 붙잡혀 총살당했다. 시민군과 관련이 있는 사람은 모조리 살해당했다. 

몽마르뜨 여성위원회의 수장으로 혁명정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미셸은 바리케이드를 쌓고 무장폭력에 가담했다. 당시 그녀는 남자들에게 조롱을 당했지만 그들에게 “남녀가 모든 인간성의 권리를 획득한 후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 한몫 해달라”고 요구하며 함께 싸웠다. 그해 12월 미셸은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요구했으나 유형을 선고받았다. 미셸은 추방 선고를 받은 코뮌의 지지자 1만 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미셸은 감옥에서 20개월을 보낸 후 1873년 8월 태평양의 뉴칼레도니아로 추방되었다. 그곳의 원주민인 카낙 사람들과 친구가 된 그녀는 카낙의 전설, 우주론, 언어 등에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카낙인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쳤고 1878년 카낙 반란에서 그들의 편을 들었다. 이듬해 그녀는 체 이크 모크 나니 반란(1871년)으로 추방된 알제리의 카빌레 아이들을 위해 누메아에서 교사가 되는 허가를 받았다.  

유형지에서 그녀는 아나키즘을 받아들였고 그 뒤 죽을 때까지 모든 형태의 정부를 거부했다. 1896년에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바꾼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과거의 일, 사건, 사람들을 고려했다. 나는 코뮌의 우리 친구들의 행동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은 세심하고, 그들의 권위를 넘는 것을 두려워해서, 결코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것 외에는 어떤 일에든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권력을 가진 선한 사람은 무능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쁜 사람은 악한 사람이고, 따라서 자유는 어떤 형태의 권력과도 연관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1880년 파리코뮌 참가자에게 사면이 내려져 미셀은 파리로 돌아와 엄청난 환영을 받았다. 그녀는 1881년 런던에서 열린 아나키스트 회의에 참석하는 등 유럽 전역에서 자본주의와 권위주의 국가를 공격하는 혁명 활동을 계속했다. 1882년에는 첫 아나키스트 연극인 <나딘>을 무대에 올렸다. 그녀는 관객 참여에 관한 장 그레이브(Jean Grave)의 이론에 따라 연극 무대를 꾸몄다. 청중들은 강연, 시, 노래의 정치 예술 프로그램을 통해 통합되었다. 관객들은 연극의 갈등을 반응하고 재연하도록 격려되었다.

1883년 3월에는 검은 깃발을 들고 실직 노동자들의 시위를 이끌었다. 이 깃발은 그 후 아나키즘의 상징이 되었다. 6년형을 받고 독방에 감금된 그녀는 1886년에 크로포트킨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과 동시에 풀려났다. 1890년에 그녀는 체포되자 정신병원에 입원하려고 시도한 후 런던으로 5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그녀는 혁신학교를 세웠으나 1892년 지하실에서 폭발물이 발견되어 문을 닫았다. 

그녀는 여성을 위한 교육을 주창했을 뿐만 아니라 결혼은 자유로워야 하고 남성은 여성에 대한 재산권을 갖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880년대 후반에 그녀는 자신의 초기 작품들의 주제를 재점검하면서도 구질서의 소멸과 그에 대응하는 새로운 사회로 대체되는 여러 작품을 썼다. 희곡 <시대의 범죄>(1888), <보델로>(1890) 등에서는 황폐한 유럽에서 농경적인 유토피아가 출현하는 변화를 그렸다. 위고의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은 그녀의 정치관은 <새로운 시대, 마지막 사상, 칼레도니아의 추억>(1887)에 묘사되었다. 미셀은 이전의 작품에서 폭력적인 혁명에 초점을 맞춘 것과 달리 후기 작품에서는 민중들의 자발적인 봉기를 강조하였다. 그녀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수단으로 테러를 배척하게 되었다. 그녀는 기술적 진보가 육체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할 것이라고 믿었다. 아나키즘이 부의 균등한 분배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 그녀는 1890년 “진보의 매력적인 힘은 매일의 빵이 보장되면서 더욱더 자신을 증명할 것이고, 매력적이고 자발적인 몇 시간의 일은 소비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산하기에 충분할 것이다”라고 했다. 

루이즈 미셸 장례식

미셸은 1895년에 세바스티안 포레와 함께 프랑스 아나키스트 정기 간행물 <르 리버테어>(리버테리안, 지금은 <르 몽드 리버테어>)를 창간했다. 같은 해 미셸은 런던에서 열린 아나키스트 회의에서 엠마 골드만을 만났다. 1895년에 프랑스로 돌아온 그녀는 1904년 알제리로 가서 반식민운동에 투신했다가 1905년 1월 마르세유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파리 장례식에는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했다. 미셀의 무덤은 파리 교외의 레발루아-페레 공동묘지에 있다. 

미셸은 아나코 페미니즘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반권위주의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초기 아나키즘 사상가들은 가정 노동의 분업과 여성과의 개인적 관계에 관한 한 문화적 정통성을 유지했다. 프랑스 아나키즘의 창시자인 프루동은 성차별주의적 견해로 악명이 높았다. 미셸과 엠마 골드만 등의 여성 아나키스트들은 19세기 후반 범유럽과 미국의 아나키즘 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바쿠닌의 주도로 유럽 여러 나라에 제1차 국제 아나키즘 부문이 형성되면서 아나키즘은 정치 운동에 여성의 참여를 장려할 뿐만 아니라 여성 해방의 이상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주목받게 되었다. 미셸은 자비에르 고티에(Xaviere Gauthier, 1942~)가 쓴 미셸의 전기《붉은 처녀》(La Vierge rouge)를 통해 1970년대에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박홍규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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