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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자가 본 교수신문-지식인의 본령 깊이있게 짚어주기
언론학자가 본 교수신문-지식인의 본령 깊이있게 짚어주기
  • 이수범 인천대
  • 승인 2004.01.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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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채찍질 해 사회발전 이끌어…‘우리이론’, ‘사자성어’ 돋보여

▲이수범/인천대 신문방송학과 ©

교수신문이 300호를 맞는다니 만감이 교차한다. 교수신문은 그동안 교수들과 교수가 되고자하는 이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주는 보고(寶庫)의 역할을 해왔다. 특히 교수채용공고, 연구과제 공모안내, 전임교원연봉자료, 신임교원명단 등의 정보 제공은 교수신문만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역할이다. 또한 최근에 기획된 ‘우리이론을 재검토한다’는 미국중심의 이론교육에서 탈피해 우리의 이론을 건설하는 생산적인 논쟁과 담론을 제공하였다고 본다.

사실 우리 학계의 가장 큰 고질병은 서양이론의 수입 자체가 아니라 ‘이론의 패션화’에 있었다. 실증주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우리 지식인들은 서양의 거의 모든 이론을 수입했지만, 과연 어느 이론이 한국의 현실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데 적합한지에 대해서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이론을 재검토한다’는 나름대로의 고민을 반영한 것이다. 우리의 현실을 독창적 개념과 방법론으로 설명해주는 이론, 즉 세계적 보편성까지 갖춘 우리 이론을 가져보자는 열정과 노력이 엿보여서 좋았다. ‘대학운영의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과 ‘세계의 대학개혁’ 등 역시 학생의 수업료에만 의존한 채 교육개혁이 절실한 우리나라 대학의 실정에서 매우 유용하고 시의적절한 기획이었다.

그러나 교수신문이 유익한 소식과 생산적인 논쟁의 담론만을 제공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제까지 미흡했던 점은 교수이자 지식인으로서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의 부재이다. 가령 최근에 보도된 성희롱사건이나 논문표절 문제는 단순히 사건보도 차원에서 흥미거리 위주로 다루어진 경향이 있었다. 이 두 가지 사례 모두 개인적 문제라기보다는 구조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한 교수의 그릇된 윤리관만을 나무라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왜 한국의 몇몇 지식인들이 표절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캠퍼스에서의 인간관계가 마치 조폭사회의 그것과 유사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문제를 다각적인 각도에서 바라보는 심층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사실 현재의 대학사회는 무수히 많은 모순과 딜레마에 빠져있다. 교수신문이 이런 모순과 딜레마로부터 지혜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해결해주는 언론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와 아울러 필자는 교수신문이 독자들과 서로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였으면 한다. 일반신문과 같이 ‘독자의 소리’란을 신설해 실제로 교수나 강사들이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구체적인 기사나 정보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어떤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문의 성공여부는 결국 ‘충성스러운 독자를 얼마나 확보하는가’가 관건이라는 점에서 볼 때, 많은 교수나 교수지망생들이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언론이 충실한 공론장(public sphere)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버마스(Habermas)에 의하면 공론장이란 여론이 형성되는 사회생활의 영역이며,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 활동이나 정치적 행위가 아닌 자유로운 사회 성원들이 공개적으로 의견을 표출하는 곳이다. 현대 사회에서 언론은 보편적으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주고 사회집단의 정체성을 부여해 주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공개성을 갖는 대표적인 공론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가지, 교수신문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딱딱한 느낌이 든다. 따라서 친근감이 느껴지는 기획을 늘리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나의 강의시간’과 ‘딸깍발이’, 그리고 ‘學而思’ 등은 친근한 기획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매년 주요 일간지 칼럼니스트와 전국 교수를 상대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를 정리할 수 있는 사자성어에 관한 설문조사는 다른 미디어의 주목을 끌만한 참신한 기획이었다. 이와 더불어 교수지망생들에게 보다 많은 관심을 보내주었으면 한다. 대부분의 대학은 교양과목의 강의를 강사에게 맡기고 있는데 이들에 대한 처우는 매우 열악하다. 대부분 강사들이 격무에 시달리다 보니, 강의 준비 시간이 부족하고, 개인적인 연구시간이 충분하지 않은데다 개론수준의 강의를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자기 발전을 꾀할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 대학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이들이 교수신문에서마저 소외(?)를 받아서는 안 된다. 결국 교수신문은 딱딱한 학술기사와 친근함이 느껴지는 정보들을 균형 있게 전달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참신한 기획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며 교수지망생들이 충성스러운 고객으로 남아있도록 이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21세기 지식생산의 핵심영역으로서 대학교육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 대학에서 전문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의 결과가 지식의 생산이고 국가경쟁력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학교육을 담당할 교수의 언론 역시 의미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교수신문이 가지는 사회적 중요성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현재 우리의 대학은 교원임용의 공정성 문제, 서울과 지방간의 학문적 격차 문제, 기초학문에 대한 경시 등 심각한 위기의 상황이다. 이러한 위기상황은 뚜렷한 교육 철학없이 국제경쟁력 강화를 최고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는 교육정책에서 기인했다. 대학은 국제학술지에 발표하는 논문 편수를 기준으로 교수와 대학의 생산성 및 경쟁력을 평가하며, 재정적인 지원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명목하에 일부 전략 분야에 편중돼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동안 교수신문은 대학사회를 냉철하게 비판하고 나름대로의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대학사회의 발전을 모색했다. 이것이 바로 지식생산의 주체인 지식인으로서의 교수를 채찍질하고 우리 사회의 발전에 일정부분 기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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