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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 교수신문
  • 승인 2020.06.18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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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최유미 지음 | b

이 책은 일방적 지배가 실패하면서 열린 의외의 가능성, 인간만이 아닌 비인간 타자들과 공유하는 공-산의 세상을 그린다. 공-산은 ‘누구’도 ‘어떤 것’도 상호의존적인 관계 바깥에서 나고 성장하고 만들어질 수 없음을 표명하는 말이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페미니즘, 과학기술학, 동물학, 생태학에서 독창적인 사유를 전개해온 과학기술학자이자 페미니스트 이론가이다. 그의 사유 전반을 담은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최유미, 도서출판 b)가 출판되었다. 공-산(共-産)은 ‘함께’를 의미하는 심(sym)과 ‘생산하다’를 의미하는 포이에시스(poiesis)의 합성어인 심포이에시스(sympoiesis)의 번역어로 택한 말이다. 공-산은 ‘누구’도 혹은 ‘어떤 것’도 상호의존적인 관계 바깥에서 나고 성장하고 만들어질 수 없음을 표명하는 말로 해러웨이 사유의 핵심적인 개념이다. 생명과 사회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법들은 개체를 중심에 두었기에, 진화는 개체가 세대를 넘어서 분기해가는 수목형의 토폴로지로 이해되었고, 인권, 동물권 등의 권리담론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해러웨이는 공생에 관한 최신의 이론들을 참조하면서 진화의 토폴로지는 구불구불한 오솔길로 이해하고 개체의 권리보다는 상호 구성적인 관계를 주목한다.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는 주체와 대상이 없는 조화로운 합일의 유토피아를 상정하지 않는다. 상대가 ‘누구’일 때 나는 반드시 ‘무엇’일 수밖에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언제나 주체(목적)이고 비인간은 대상(수단)이라는 서구의 인간학은 역동적이고 세속적인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 책이 포착하는 것은 일방적인 지배가 실패하면서 열어놓는 의외의 가능성들이고, 인간만이 아닌 비인간 타자들과 공유하고 있는 공-산의 세상이다.

해러웨이는 경계에 있는 자들의 전복적인 형상을 통해 자연/문화, 여성/남성, 동물/인간, 기계/유기체 등의 온갖 이분법과 대결해 왔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 가운데 하나인 「사이보그 선언」은 우주전사 일색이었던 사이보그 이미지를 여성-기계-동물 하이브리드로 재형상화하면서 페미니스트 사이보그의 가능성을 열었다. 2003년에 발표된 「반려종 선언」은 평범한 개로부터 반려종이라는 개념을 창안한다. 개는 친숙한 자이지만 동시에 잘 알지 못하는 자이다. 오랜 세월을 우리와 함께 살아온 인간, 비인간 타자들 역시 친숙한 자와 잘 알지 못하는 자가 겹쳐진 ‘중요한 타자’이다. 중요한 타자는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로 환원되지 않고, 때로 기쁨으로 빛나는 얼굴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타자를 위한 실천적인 윤리는 무엇과 단절하고 무엇과 연결할 것인지를 묻는다. 또한 이 책은 해러웨이의 페미니스트 인식론과 과학기술론을 중요하게 다루는데, 해러웨이는 과학기술을 특권화하지 않으면서 함께 살기위해 유용한, 그러나 무구하다고 할 수 없는 지식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생태위기와 기후위기, 그리고 감염병의 전 지구적인 대유행의 시대다. 이 위기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는 긴급성을 가지고 이 위기에 대처할 것을 주장하지만,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이 세계는 인간만의, 혹은 남성만의 세계가 아니고 인간 비인간, 공-산의 존재자들이 오랜 세월 함께 만들어온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혹은 우회로를 만들기 위해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는 인간-비인간의 협동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창의적으로 계승할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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