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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시대의 사회사
사대부시대의 사회사
  • 교수신문
  • 승인 2020.06.18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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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시대의 사회사.
사대부시대의 사회사.

유승원 지음 | 역사비평사

식민사관ㆍ서구중심주의사관에 의해 한국사의 진정한 내재적 발전은 왜곡되고 매몰되었다. 조선사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사실이라기보다 식민사관과 그 배후에 있는 서구중심 주의사관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한국사 인식(=진정한 내재적 발전의 과정, 즉 원시사회-귀족사회-문벌사회-사대부사회로의 이행)을 모색해야 한다. 그에 따라 조선사회를 제대로 인식하려면 조선 후기에 보수반동화한 양반의 행태만을 대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여말선초의 문벌사회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열었던 조선 사대부의 혁신적인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조선사회는 결코 폐쇄적이고 낙후된 사회가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사회는 만인의 법제적 평등이라는 근대의 이념을 이미 상당 부분 구현한 개방적인 사회였고, 조선 말기에는 신분제(노비제)를 폐기함으로써 마침내 근대사회에 진입할 수 있었던 사회였다.

사대부계급이 주도한 조선 사회부사회는 사회수준이 높았고,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인구의 대다수가 법제적 평등을 누렸기 때문에 노비를 제외한 인민들은 보편적인 권리와 의무를 지녔고, 적지 않은 평민들이 근거리 이동을 통해서 상승이동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이 민본ㆍ위민을 이념적 목표로 설정함으로써 인민의 권리와 복지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와 함께 위정자의 자의적 침탈도 어느 정도까지 제어할 수 있었다.

서구에서는 귀족과 평민이 대립한 반면, 조선에서는 자유인과 예속인의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서구의 귀족들이 자신의 정당성을 군사적 임무에서 찾았던 무인이었다면, 조선의 사대부들은 사회공공성의 구현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찾은 문인이었다. 유럽의 경우 초기 근대까지 귀족사회가 유지되었던 반면, 한국에서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세습귀족이 존재하지 않았고, 조선시대에는 법제적으로 평민의 사회이동이 폭넓게 허용되었다. 귀족제의 존재에 강조점을 둘 것인가 아니면 노비제의 존재에 강조점을 둘 것인가에 따라, 서구사회와 조선사회의 폐쇄성의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조선이라는 사회에는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못한, 계급·정치·경제·사회별로 주목할 만한 구조적 특성이 많이 있다. 조선의 양천제에 대해 “양천제는 조선시대의 신분제가 아니다, 양천제는 조선 초기라는 과도기의 신분제에 불과하다, 평민이 과거에 응시하기도 합격하기도 어려웠으므로 양천제는 의미가 없다”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조선시대에 평민의 벼슬길이나 과거 응시를 막는 법제적 장벽은 전혀 없었다. 비록 평민의 문과 합격 사례가 매우 적었다 하더라도, 평민의 사회이동의 법제적 인정은 그 자체로 중요할 뿐 아니라 조선시대 평민의 권리의식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조선사회는 기본적으로 사대부ㆍ평민ㆍ노비의 3분법적 계급구성을 보였다. 따라서 사대부와 평민은 신분이 아니라 계급이며, 노비는 신분이자 계급이었다.

조선시대의 관료제는 적어도 기술적인 면에서 서구 근대 관료제의 이상형에 가까운 것으로, 베버가 말한 근대 관료제의 합리성 즉 몰가치성과 효율성이 그대로 발휘되고 있었다. 군주는 전제군주가 아닌 제한군주의 성격을 가짐으로써 민본ㆍ위민이념과 법치주의 원칙에 따라 자의적인 권력 행사가 결정적인 제약을 받고 있었다. 또한 제도적으로 수직적(군주, 고위관원, 중소장관원)ㆍ수평적(의정부 같은 심의기구, 육조와 속아문으로 구성된 일반 행정기구,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 같은 언론-감찰기구) 권력분립이 이루어져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조선사회 세제의 가장 뚜렷한 비교사적 특성은 국민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국가에 납세해야 한다는 ‘개세제’가 철저히 시행된 데 있다. 계급ㆍ신분ㆍ지위를 가리지 않았다. 이 점에서 근대 이전에 조선사회에 필적할 만한 사회를 찾기 어렵다. ‘비례세’는 개세제와 결합할 때에야 비로소 나름대로의 조세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었고, 농지를 가진 누구에게나 소유량에 비례하여 담세하게 한 것이 바로 조선시대 세제의 비교사적 특성이었던 것이다.

사대부계급의 성향과 이해관계는 조선시대 각 분야의 사회구조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조선의 사대부계급은 중소 규모의 토지 및 노비 소유를 표준적인 경제적 토대로 하는 지식계급이자 정치 주체로서의 의식을 강하게 지닌 부류였다. 사대부는 무엇보다 특권신분이 아닌 지식계급이라는 점에서 귀족과 같은 다른 지역의 지배계급과 달랐다.

그들이 보편적인 권리ㆍ의무체계를 추구하면서도 노비만은 영구히 배제하는 양천신분제를 유지한 점, 민본ㆍ위민 이념을 신봉하면서도 정작 왕도정치의 실현 방안으로는 민생보다 수기를 앞세운 점, 군주를 정점에 두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구축하면서도 제한군주제를 추구하고 수직적 권력분립을 모색한 점, 또한 자신들의 소유권을 강화하는 한편 조세상의 형평성을 실현하려 한 점 등을 살펴볼 때, 그들의 성향과 이해관계는 조선 각 분야의 사회구조에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지배방식에 있어서, 조선의 사대부계급은 귀족과 달리 독특한 방식을 추구했다. 피지배계급을 평민과 노비로 양분하여 ‘분할지배’를 도모하는가 하면, 직접적인 지배 대신 국가나 군주에 의한 ‘간접적 지배’를 추구했으며, 물리적 지배 대신 명분이나 윤리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비물리적 지배’를 내세웠다. 특히 사대부들이 잠재적 계급에서 양반이라는 대자적 계급으로 발전하면서부터, 그들은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다른 사대부계급들과 연대하고 힘을 합쳐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향촌에서 ‘집단적인 지배’를 실현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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