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03:50 (토)
[박희숙의 숨겨진 그림 이야기] 금수저, 자기 하기 나름
[박희숙의 숨겨진 그림 이야기] 금수저, 자기 하기 나름
  • 박희숙
  • 승인 2020.06.17 15: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루이 오귀스트 세잔의 초상'-1866년, 캔버스에 유채, 200*120,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루이 오귀스트 세잔의 초상'-1866년, 캔버스에 유채, 200*120,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요즘 수저 논란이 뜨겁다. 금수저냐 흙수저냐다. 현대판 카스트 제도라고 할 수 있는 수저 논란의 기본은 돈이다. 과거에는 신분제도에 의해 출신 성분이 나누어졌지만 요즘은 돈에 의해 나누어진다고 할 수 있다. 금수저로 태어나는 순간 가정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이 많아지고 그 혜택은 사회까지 이어진다. 흙수저로 태어나면 사회적 성취감을 맞보기 이전에 온갖 고생은 다 한다는 이야기다.

사회가 돈에 의해 신분을 나누듯 화가도 금수저로 태어나면 편하다. 대부분 사람들은 예술가는 지질하게 고생하다 후에 예술성을 인정받는 순간부터 고생 끝 낙이 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라파엘로는 일찍이 예술은 자본 위에서 꽃이 핀다고 이야기했다. 예술을 하거나 사회적으로 예술을 지향하는 데 있어서 자본이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금수저로 태어났기에 예술을 지향하는 데 있어 덕을 본 화가가 세잔이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확립되었던 미술의 규범인 원근법을 무시하고 새로운 형식으로 표현한 폴 세잔(1839~1906)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발견하고자 오랜 시간이 걸렸던 화가다.

세잔이 화가로서 유난히 행운이 따르지 않아 늦게 알려졌지만 안정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다른 화가들과 다르게 부유한 아버지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잔의 아버지 루이 오귀스트는 은행가로서 자신의 은행을 물려주기 위해 아들에게 법학 공부를 원한다. 세잔은 아버지의 희망대로 법학대로 진학을 하지만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아버지 몰래 미술학교에 강의를 들으러 다니면서 자신의 천직은 화가라고 생각한다.

'니스에서 사두마차를 끄는 로트레크 백작'-1881년, 38*51, 파리 프티 팔레 미술관 소장
'니스에서 사두마차를 끄는 로트레크 백작'-1881년, 38*51, 파리 프티 팔레 미술관 소장

루이 오귀스트는 당시 부르주아 사회에서 가장 경멸받던 직업인 화가가 되고 싶어 하는 아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루이 오귀스트는 자식들에게 엄격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는 세잔이 그림으로 상을 받자 화가가 되는 것을 허락한다.

세잔이 아버지를 그린 작품이 '루이 오귀스트 세잔의 초상'이다.

루이 오귀스트 세잔은 일인용 꽃무늬 소파에 앉아 양쪽 손으로 신문을 잡고 읽고 있다. 신문을 잡고 있는 손가락은 꼼꼼한 성격을 나타내고 있으며 굳게 다문 입술을 완고한 성격을 드러낸다.

의자 위 벽에 걸려 있는 정물화는 세잔이 그린 정물화로 당시 세잔은 팔레트 나이프를 사용해 두껍고 불규칙하게 칠해 사물을 표현했다.  

세잔의 아버지가 앉아 있는 소파의 꽃무늬가 불분명하지만 소파 바탕의 밝은 색과 대비되어 구분되고 있다. 소파 역시 흑백으로 명암을 표현하지 않고 색으로 명암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 시기부터 세잔은 색으로 원근법을 표현하는 방식을 택했다.

검은색 외투와 모자는 보수주의자였던 세잔의 아버지의 성격을 나타낸다. 세잔의 아버지가 이 작품에 모델이 된 것은 화가가 되겠다는 아들의 야망을 인정한 것으로 그는 모자 사업으로 돈을 벌어 후에 은행가가 된 자수성가 한 사람으로 항상 정해진 시간에 우편물과 신문을 읽었다.

이 작품에서 아버지가 레벤망 신문지을 읽고 있지만 사실 그는 자유주의적 사상을 담은 레벤망 신문은 읽지 않았다. 세잔이 의도적으로 이 신문을 선택한 것은 친구 에밀 졸라 때문이다. 에밀 졸라는 레벤망 신문에 기자로 활동하면서 예술계의 움직임을 알려주는 기사를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기사를 쓰면서 졸라는 공식적인 견해들과 반대되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힌다. 결국 레벤망 신문은 졸라보다 덜 이단적인 기자에게 예술계의 동향을 알려주는 역할을 맡기기에 이른다. 세잔은 졸라의 예술적 견해를 찬성하기 위해 레벤망 신문을 읽고 있는 아버지를 그린 것이다. (세잔과 에밀 졸라 두 사람은 중학교 동창으로 졸라가 일찍 아버지를 잃어 시골 엑상프로방스로 전학을 오면서 우정이 시작되었다. 후에 세잔이 사과 그림으로 예술적 세계를 구축하게 된 계기도 에밀 졸라와의 추억 때문이며 세잔이 그림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에밀 졸라와 어머니가 아버지를 설득해서다. 하지만 에밀 졸라의 소설에서 세잔을 실패한 예술가로 표현하면서 두 사람의 우정은 끝이 난다.)

루이 오귀스트는 세잔의 그림을 처음으로 사들이면서 아들이 파리에서의 공부를 승낙하게 된다. 파리에서 세잔은 화가로서 출세의 지름길이었던 미술학교에 입학하지 못한다. 이에 실망을 했지만 루이 오귀스트는 아들이 파리에서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게끔 생활비와 학비 등 경제적 후원을 해주었다. 세잔의 아버지가 붙여주는 돈은 인색했지만 그것도 다른 화가들의 비해 엄청난 행운이었다. 

빨리 출세하고 싶었던 세잔은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하지만 낙선을 한다. 그는 살롱전에 반발해 새로운 미술 문화를 펼치고 있던 젊은 인상파 화가들의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세잔의 의심 많은 성격으로 인해 파리 젊은 인상파 미술인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기인으로 취급을 받는다. 세잔은 파리에서 거듭된 낙선으로 고향 엑스에 자주 내려갔다. 고향 엑스에서 한동안 지낸 후 세잔은 1869년 파리로 돌아온다. 그 해 세잔은 19세의 모델 오르탕스 피케를 만난다. 키가 크고 아름다운 오르탕스와 세잔은 사랑에 빠져 동거에 들어가지만 세잔은 두 사람의 관계를 숨기기로 한다. 꾸준하게 생활비를 대주는 아버지에게는 알릴 수가 없었다.

루이 오귀스트는 세잔이 나이 들어도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재료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해결해주고 있었지만 결혼만큼은 정상적인 가정의 여자와 하기를 원했다.

결국 아버지에게 세잔은 동거 사실이 들켜 생활비 절반이 삭감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세잔의 나이 47세에 결혼을 한다. 세잔은 아들을 사랑해 사생아를 만들고 싶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녀와 결혼을 했던 것이다.  

세잔의 재능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아버지 루이 오귀스트는 “우리 아들은 보헤미안이니까 가난하게 살겠지”하며 죽을 때까지 가난하게 살 아들을 걱정해서 유산으로 막대한 재산을 물려줌으로써 세잔이 걱정 없이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한다.

아버지에게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지만 세잔은 검소한 생활에 익숙해 있어 자신의 생활태도를 바꾸지는 않았다. 고향 엑상 프로방스에서 세잔은 아버지 유산으로 그림에만 전념했고 그 덕분에 현대 미술이 시작을 알리는 그림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세잔은 부유한 아버지로부터 후원으로 그림에 전념할 수 있었다면 인상주의 화가 로트레크는 금수저이지만 아버지의 후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에게 철저하게 외면을 받았다. 

툴루스 로트레크(1864~1901)는 프랑스 명문 귀족 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퐁스 그 톨루스 로트레크 몽파 백작은 남프랑스에 여러 곳에 사유지를 소유할 정도로 부유한 귀족이었지만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성적으로도 방탕했으며 그는 유난히 매사냥하기를 매우 좋아했다.

알퐁스 백작은 이종사촌 간이었던 아델 타피에 드 세리랑과 결혼을 해 로트렉크를 낳았다. 사촌 간 결혼은 대대로 이어져 오던 전통이었지만 그들의 결혼은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에 부부는 형식적인 관계만 유지했다.

허약하게 태어난 로트레크는 13살 때 사고로 한쪽 다리가 부러졌고 14세 때에는 다른 다리마저 골절되었다. 근친결혼으로 인한 유전적인 결합이 있었던 로트레크는 더 이상 성장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멈추어버렸다. 상체는 정상이었지만 하체는 짧은 기형적인 체구가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키가 152센티밖에 되지를 않았다.

불구가 된 로트레크를 아버지 알퐁스 백작은 아들로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외면에 의도적으로 반항하고 있었지만 어린 로트레크는 병실에 누워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알퐁스 백작은 불구가 된 아들이 그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친구였던 화가 프랭스토, 존 루이스 브라운에게 상담한다. 그들은 로트레크에게 미술학교 입학을 권한다.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로트레크는 아카데미에 입학을 한다. 학교에서 규칙은 잘 따랐지만 그렇다고 전통을 따른 것은 아니다. 그때부터 자신만의 독장적인 기법은 연구한다.

로트레크의 초창기 독창적인 기법으로 그려진 작품이 '니스에서 사두마차를 끄는 로트레크 백작'이다.

로트레크 백작은 전면에 사두마차를 끌고 있다. 기병대 출신이었던 로트레크 백작의 독특한 순간을 재현하고 있는 이 작품은 백작의 성격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달려가는 말의 움직임을 통해 생동감이 느껴지고 있다는 것이다.  

뒤에 보이는 배경은 로트레크의 고향의 아름다운 풍경으로서 빠른 붓놀림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은 것은 마차의 속도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아버지와 같은 인생을 살고 싶었지만 아버지처럼 살 수 없었던 로트레크의 인생은 몽마르트르를 발견하면서 달라졌다. 로트레크에게 몽마르트의 환락가를 소개해준 사람은 아버지 로트레크 백작이다. 장애인이 된 아들은 싫어했지만 당시 중산층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환락가를 소개해주는 것을 의무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로트레크는 몽마르트르에서 화가로서 원하지 않았던 명성을 얻었지만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알코올로 인해 정신착란증까지 겪고 있는 로트레크는 정신병원에서 아버지에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알퐁스 백작은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회피했다. 알퐁스 백작은 이때에도 사냥에 빠져 있어서 아들을 영국으로 보내라는 편지만 보냈을 뿐이다.

죽을 때까지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던 로트레크였지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와 같은 귀족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원하지 않아도 로트레크는 자신의 노력으로 화가로서의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태어남을 선택할 수 없다. 운명이 쳐 놓은 그물 앞에서 헤엄을 어떻게 치느냐에 따라 운명을 거스를 수도 있고 운명에 순종해 살 수도 있다. 세잔과 로트레크를 보면 금 수저로 태어났다고 해서 인생이 탄탄대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금수저도 자기하기 나름이다. 실력과 인성이 되지 못하면 원치 않는 인생을 살 수도 있다.

박희숙 화가, 전 강릉대 교수.
박희숙 화가, 전 강릉대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