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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32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32
  • 김용준 교수
  • 승인 2004.01.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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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묶인 잡지, 복간호의 풍경들

▲한자리에 모인 계훈제, 장준하, 김재준, 함석헌, 이병진(왼쪽부터) ©

한 마디로 '씨알의 소리'의 고고성은 5·16 군사정권에 대한 준엄한 꾸지람으로 일관한다. 미국 국무성 한국과정 앞에서 군사정부는 잘 하고 있다는 한 마디로 입을 다문 바보새 함석헌은 군사정부의 사꾸라라는 누명까지 뒤집어썼지만 이 땅에 발을 붙이면서 외치기 시작한 그의 사자후는 '씨알의 소리'지를 내면서 더욱 구체화된다.

창간호를 낸 다음 2호지(1970년 5월호)에서 '5·16을 되돌아본다-四捨五入'이라는 글에서 5·16을 '汚一戮'으로 규정한다. 글세 '한 칼의 더러운 도륙'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밉거나 곱거나 간에 5·16의 뜻이나 값은 4·19의 관계를 내놓고는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역사를 말하는 때에 밉고 고움에 붙잡혀서는 아니 됩니다. 공동체인 이상, 연대 책임인 이상, 곱다면 곱고 밉다면 다 밉습니다. 미운 일을 한 사람일수록 그 노릇을 맡았던 것이 가엽습니다. 사람도 많은데 네가 하필 그 노릇을 했느냐! 그러나 곱고 미움은 말하지 않아도 잘했다 못했다는 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10년이 돼 오는 오늘 무슨 지나간 잘못을 뇌까리느냐 할지 모르지만 역사는 문제입니다. 풀지 않고 넘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모든 사건 풀지 못한 문제의 항이요 그것이 풀릴 때까지는 역사는 바른 길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십년이 지났어도 백년이 지났어도 따질 것은 따져야 합니다. 오늘의 사회가 이렇게 흐리터분한 것은 5·16을 아직 숙제로 두고 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풀었으니 그냥 넘어가잔 것은 정권 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국민의 가슴엔 언제나 걸린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일을 판단하는 능력이 흐려집니다. 그러면 닥쳐오는 일을 또 잘못합니다. 분명히 따져서 국민 전체가 그렇다하고 승인을 하게 되어야 역사는 진행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재판에서 한번 판결 내린 그 전례가 역사에서 한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5·16은 분명히 4·19에 맞서 일어난 것입니다. 革命에 대한 反革命입니다. 5·16 정권이 5·16을 될수록 혁명으로 규정짓고 4·19를 혁명이 아니라고 하려고 갖은 수단을 써서 구구한 억지를 억지 설명을 하는 그 일이 벌써 그것을 증명합니다. 나는 도둑 아니다 하는 것이 도둑인 증거입니다….
오늘 정치가 이렇게 된 원인은 5·16이 당초 잘못된 정신에서 나온데 있다해야 할 것입니다. 四捨五入이라 했지만 자유당의 四捨五入이나 공화당의 국회 별실 날치기 투표나 무엇이 다릅니까? 그러므로 4·19후에 5·16이 온 것은 四捨五入이다 합니다. 四捨五入을 해서까지 국민을 농락하자는 것은 思邪誤入입니다. 생각이 비뚤어졌기 때문에 못 들어갈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전집 17:181, 183∼4)

5·16을  汚一戮이라하고 사사오입을 思邪誤入이라고 정면 도전하는 '씨알의 소리'를 당시의 군사독재정권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당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세를 자랑하는 중앙정보부의 힘을 가지고도 덮어놓고 언론지를 그만두게 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트집이 등록된 인쇄소에서 인쇄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시의 심범식 문화공보부 장관은 정기 간행물 등록취소 및 언론활동금지 처분을 1970년 5월 28일자로 내렸다. 여기서 길게 '씨알의 소리'지의 승소 경위를 자세히 소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어떻든 당시 이 나라의 원로 변호사라 할 수 있는 이병린(李丙璘)님이 무료 번호를 자청해서 결국 1971년 7월 6일 대법원 선고공판에서 '씨알의 소리 勝訴'가 확정되었다. 등록취소 된지 13개월 6일 만의 일이었다. 그래서 복간호(1971년 8월호)가 발행되었다. 이 복간호의 첫머리에 '讀者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로 선생님의 음성을 직접 들어보자.

<아시다시피 지난해에 1호, 2호를 내고 발행정지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이치에 어그러지는 일인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치가 죽어버린 이 정치 밑에서라도 씨알까지 이치를 버려서는 아니됩니다. 그러나 내가 이치를 지키려면 대적의 속에도 이치를 버려서는 아니됩니다. 그러나 내가 이치를 지키려면 대적의 속에도 이치를 지킬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치에 어그러지는 압박을 받고 그대로 참기만 하면 나는 비록 이치를 어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저쪽을 이치를 깨달을 가능성이 아주 없는 짐승으로 대접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면 내 이치는 죽은 이치가 되버리고 맙니다. 저쪽을 사람으로 인정하려면 그가 깨달을 때까지 싸워야 합니다. 잘못을 언제나 나와 그 사이의 상관적인 것이지 결코 그만의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바로 잡으려면 그와 더불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권력없는 내가 권력있는 그와 싸우려면 내가 고통을 당할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와 그를 사람으로 건지기 위하여 또 전체를 건지기 위하여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행정소송을 걸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사법부를 믿은 것입니다. 아무리 타락된 이 정치에서라도 그래도 사법부는 사법부대로 양심이 있겠지 믿었기 때문에 거기 호소했습니다….나는 씨알 전체를 믿은 것입니다> (전집 8:16)

여기서 나는 앞에서 인용한 선생님의 글에서 말씀하신 老子 27장의 <聖人常救人. 故無棄人. 常善救物. 故無棄物. 是謂襲明. 故善人不善人之師 不善人者善人之資.> (성인은 늘 사람을 건지고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항상 물자를 건지며 물자를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푹 밝음이라 하다. 따라서 착한 사람은 착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고 착하지 않은 사람은 착한 사람의 자원이다.>라는 깊은 철학을 엿보게 된다. 바로 지난번에 소개한 씨알의 철학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핍박하는 너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깊은 뜻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복간호에 長容 金衣俊  목사님의 '씨알은 죽지 않는다. -'씨알의 소리' 復刊에 부쳐-'라는 글이 눈을 끈다. 그리고 선생님의 '팬들 힐의 명상'이라는 글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선생님은 발생정지처분을 받아 잡지를 못내고 있는 동안에 1970년 8월 1일부터 열흘 동안 스웨덴의 시그투나(Sigtuna)에서 퀘이커의 제11차 삼년대회에 참석차 한국을 떠난다. 이 모임이 끝난 다음에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연회의 모임에 또 열흘 동안 참석하고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962년 가을에 가 있었던 팬들힐에 또 가서 다섯 달 동안을 머물고 1971년 1월 말에 미국을 떠나 다시 영국으로 가서 런던 버밍햄 맨체스터 등지를 거쳐서 유럽 대륙 나라들을 잠깐 잠깐 방문하고 이스라엘로 가서 한 주일 동안 예루살렘 부근을 구경한 다음 2월 하순에 인도로 가서 두 달을 머물려 이곳 저곳을 본 후 4월 22일에 귀국한다. 거의 10개월 간을 해외에 머문 셈이다. 그래서 씌여진 글이 '달라지는 세계의 한길 위에서'(전집 10:114∼178)이다. 이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선생님은 분명히 이 여행을 통해서 '팬들힐의 명상'에서 경험한 모욕과 고뇌에 파묻혀 있는 유다 옆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친구 없어도 살 수 없지만 그 친구 늘 있으면 방해가 됩니다. 생각이 같은 사람은 울타리가 되어 밖을 못 내다보게 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은 밤낮 같은 시비만 되풀이 해 내 속에서 돋아나는 夜氣를 다 뜯어먹고 짓밟는 마소가 되서 못 씁니다. 이따금 떠나야 합니다.
나라야 잘났어도 내님, 못났어도 내님, 살아도 거기서 죽어도 거기서지만 그래도 이따금 떠나야 합니다. 밉고도 고운 내 님, 그 미움도 멀리서 봐야 더 잘 알고 그 고움도 남의 눈이 한번 되서 봐야 더 은근해 집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여행처럼 좋은 것은 없습니다. >

 선생님의 求道的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 여행에서 돌아오신 후에 선생님은 '노자의 모임'을 정동교회의 젠센 기념관에서 시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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