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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닮은 두 기억연구, 원전의 영향권에서 맴돌다
너무나 닮은 두 기억연구, 원전의 영향권에서 맴돌다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01.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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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서평 : 『기억의 공간』과 『기억과 망각』

요즘 독일문예학을 전공한 학자들 사이에서 '문화적 기억'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용어는 역사가들이 관리하는 사료적 기억과도 미시사의 '사소한 기억'과도 다른 기억이다. 문화적 기억은 인간의 신체에서 전승돼온 내밀한 기억을 말한다. 인간이라는 중심숙주가 영화, 건축, 문학, 미술 등의 다양한 문화적 매체인 보조숙주와 상호 주고받으면서 현실화되거나 다시 내면으로 온축되는 과정과 산물들을 종합적으로 의미한다.

현대의 의미를 캐는 열쇠말 '문화적 기억'

문화적 기억의 재현방식은 무의식과도 비슷하다. 산발적이고 명이 짧고 수면 밑에 있다. 하지만 많은 텍스트가 이것의 흔적을 간직하며, 역사도 이런 기반에서 새롭게 해석돼야 한다는 관점이 독일학자들을 중심으로 제출되고 있다. 오늘날 고구려사 사태처럼 랑케류의 민족사관이 과열되거나, 아니면 심리적으로 너무 난해한 작품해석에 이것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근대와 탈근대의 서사를 두루두루 꿰는 열쇠말의 탄생이 운위되는 모양이다. 독일 학계는 야우스와 이저의 수용미학 이후 문예학의 마땅한 중심추가 없던 판에 이것이 활력소가 되고 있다는 동향소식도 들려온다.

이 독일發 기억이 국내에도 상륙했다. 관련서 2권이 출간됐는데, 하나는 1990년대 후반 이 용어를 처음으로 본격화시킨 알라이다 아스만 교수의 책 '기억의 공간'(변학수 외 옮김, 경북대출판부 刊)이다. 이 책은 지난 1999년 따끈따끈할 때 번역됐지만 출판사를 만나지 못해 올해에야 빛을 볼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국내 학자들이 학진 프로젝트 결과물로 펴낸 '기억과 망각'(최문규 외 지음, 책세상 刊)이다. 이 책은 위의 아스만을 정전으로 삼아 '문화적 기억'에 대한 개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으며, 텍스트 분석도 곁들였다.

먼저 궁금한 것이 있다. 국내연구가 원저서를 얼마나 훌륭하게 재해석했는지, 그 새로운 개념을 어떻게 잘 적용하고 있는지 말이다. 원래 이런 개념들은 국내 담론에서 닳고닳은 후에야 원저서가 번역되곤 했는데, 이번엔 국내서와 원저서가 동시에 출간돼 독자들에게 비교독서의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어 고무적이다.

두 책은 목차에서부터 서로 다른 구성을 보여준다. 아스만은 産婆답게 기억의 기능에 대한 다양한 정의부터, 기억을 보존전달해온 매체의 역사, 기억의 저장소에 대한 성찰로 나아간다. 이를 통해 문화가 그 사회의 지식을 보존키 위해 역사적·기술적으로 어떻게 변화하는지 밝혀내고 있다. "기억은 단순히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타협을 하고, 매개되고 적응되는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말이다.

아스만의 책은 다소 산만하다. 기억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죄다 빨아올려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추상적인 기억, 보편적인 기억, 집단기억과 개인기억, 무의식과 기억의 관계 등이 섞여서 논의된다. 프로이트와 관련된 부분은 다소 소략해서,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에서 기억을 분류하는 부분은 세밀하지 못하고, 전체적으로 절충주의적인 측면도 보여진다.

'기억과 망각'은 이런 문화적 기억을 민속학, 정신분석학, 소설분석, 역사드라마, 인터넷 공간을 읽기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면서 점점 아스만 교수의 그늘이 책 전체에 깊이 드리우고 있음을 알게 된다. 특히 '기억과 망각의 역설적 결합으로서의 글쓰기'와 '그리스의 문자문화와 문화적 기억' 등 2편은 아스만의 품안에서 '노는' 글들이다.

개념을 풀면서 몸풀기도 하는 서론에서의 인용은 그렇다 쳐도, 구체적인 텍스트 분석에까지 아스만의 시각을 빌리고 있다. 아스만을 인용하는 것을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두 글에서 기억과 시간의 관계를 따지기 위해 인용되는 얀 아스만(알라이다의 남편), 라인하르트 코젤렉, 니체, 플라톤 등이 모두 알라이다 아스만에 의해 다듬어진 2차 재료들인 탓이다. 외투만 빌린 게 아니라 속옷까지 빌려입는 글에서 제대로 맛이 날리 없다. 읽는 내내 아스만을 되풀이해 읽는, 하지만 더욱 어렵게 꼬아서 읽고 있다는 느낌이 떠나지 않는다.

'번안'인가 '해설'인가, 국내 지식생산 역량 건드려

또 하나의 문제는 총 7편의 글에서 내용상 겹치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문화적 기억'이라는 것에서 프로이트적인 것을 강조하는 글, 아니면 민속학적인 것을 강조하는 글, 혹은 카프카를 전면에 내세우는 글 등의 차이를 보여줄 뿐 전하는 내용은 비슷하다. 기억도 생산이지만 망각도 생산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기본전제에서 비교적 발전하고 있는 글은 '망각의 담론, 기능 그리고 역사' 정도다. 이 글에서 소설가 박완서가 기억을 가리켜 "기억은 상상력에 가깝다"라고 말한 것을 정신대 할머니의 진술이 보여주는 특성에서 찾아낸 부분은 책 전체에서 아주 드물게 만나는 '오아시스'다. 나머지는 서로 다른 소재와 분석법을 취했지만 비슷하고 두루뭉수리한 서술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알라이다 아스만의 책이 나오지 않았다면, '기억과 망각'이라는 책은 '문화적 기억'에 대한 꽤 흥미로운 소개서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7명이 지은 책보다 훨씬 함의하는 바가 많고, 더 쉽고, 풍부한 역사적·분석적 사례를 지닌 '원저서'가 번역된 이상, 국내의 해외이론 소개서는 빛을 잃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비판적 재해석도, 독창적 현상분석도 발견하기 어려우니 당연하다. 원서출판이 활발해진 요즘 국내 지식생산의 자생성이 더욱 투철한 방식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이번 사례가 잘 증명해주고 있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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