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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논평-교수사회의 '고아의식'
교수논평-교수사회의 '고아의식'
  • 신정완 성공회대
  • 승인 2004.01.05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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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친부모 노릇에 힘써야
▲신정완 성공회대 경제학 ©
세상일이 제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나이가 되었으면서도 다시 맞는 새해 초에는 여전히 새로운 희망과 기대감으로 설레게 된다. 이맘때면 대부분의 교수들은 올해에는 꼭 교육과 연구에서 큰 성취를 이루어보리라고 다짐하게 될 것이다. 특히 교육과 연구의 善循環이야말로 교수들이 갖는 꿈의 핵심일 것이다. 연구에서 큰 진전을 이루고 그 성과를 수준 높은 교육으로 구현하며, 교육과정에서 얻은 지적 자극과 아이디어에 기초하여 더 나은 연구를 이루어가는 선순환이야말로 대다수 교수들이 늘 꿈꾸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는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다. 교육과 연구를 매개할 수 있는 제도적 공간인 국내 대학원들이 빠르게 枯死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대학원의 고사 내지 空洞化의 원인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국내 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해 박사학위를 취득해도 취업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그 동안 박사 학위자가 수요에 비하여 과잉공급 된 데에도 기인하지만 국내 학위자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에도 기인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처방도 이미 여러 곳에서 다수 나온 바 있다. 교수 임용에서 국내박사할당제 도입, 대학원생에 대한 경제적 지원 확대, 시간강사의 지위와 처우 개선, 대학원 전담교수제 도입, 대학원 정원의 축소와 대학원 교육의 질 제고, 논문지도교수 자격조건의 엄격화 등. 이 글에서는 새로운 처방을 제시하기보다는 국내 대학원의 고사를 낳게 된 뿌리 깊은 원인으로서 우리 교수사회의 정신적 풍토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외국, 특히 미국에서 학위를 취득한 교수들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 교수사회에는 ‘학문적 친부모’ 없이 자랐다는 정신적 ‘고아의식’이 만연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외국 대학에 입양되어 학문적 ‘양부모’로부터 훈련받아 국내 대학에 교수로 돌아왔지만 제도와 관행, 재정기반에 있어 외국 유수 대학과는 차이가 많은 국내 대학에서 제대로 학문적 친부모 노릇을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록 자신은 친부모 없이 자랐지만 자신이라도 제대로 친부모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학문적 잠재력이 큰 학생을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외국 유수 대학에 입양시켜 키워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학위를 취득한 교수들의 경우에는 우리의 대학 및 사회와 씨름하고 뒹굴며 자라온 관계로 ‘헝그리 정신’과 ‘잡초의 생명력’은 확보하였으나, 먼 나라에서 만들어진 이론들을 귀동냥하며 자라온 관계로 학문적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러한 태도는 서양 근대 학문이 이식된 지도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상황에서 지적 정직성과 겸손의 발로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겸손도 지나치면 약보다 병이 되기 쉽다. 과도한 겸손은 흔히 무책임성으로 귀결되기 쉽다. 그리고 외국 유수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한 교수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겸손이 흔히 다른 형태의 지적 우월감과 공존하기 쉽다. 외국의 유수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다는 것은 적어도 ‘학생’으로서는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월감은 자신을 성숙한 부모의 위치가 아니라 여전히 똘똘한 자식의 위치에 놓고 볼 때 생기는 감정이다.

이제는 이러한 과도한 겸손과 부적절한 우월감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대학원을 제대로 살려내려 애쓰고 제자들에게 제대로 학문적 친부모 노릇을 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외국의 학문과 대학에 과도하게 주눅들기보다는 차라리 허파에 빵빵하게 바람을 채워 다소 능력과 조건에 부족함이 있더라도 노력과 애정으로 학문적 자식들을 힘껏 키워보려는 소명의식과 자신감을 키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학계에 가장 결핍된 요소의 하나인 ‘세대간 연대’를 새로이 형성해가려 노력하며 국내 대학원의 발전을 저해하는 제도와 관행을 극복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제자들이라도 앞으로 학문적 고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수들도 자신의 지도 하에 잘 성장하여 자신보다 학문적 키가 훨씬 커진 학문적 자식들을 바라보는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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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2004-01-12 12:22:38
우리도 교수다운 교수끼리 모여서 학파를 만들고 학문적 토론(열띤 논쟁수준까지)이 많았으면 합니다. 과감이 외국 유명 학자의 이론에 틀린점도 지적하면서 서로 어깨를 견주는 모습이 나왔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