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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철주의 미술놀이 ‘외화내빈(外華內彬)’] 물도 낯을 가리는가?
[손철주의 미술놀이 ‘외화내빈(外華內彬)’] 물도 낯을 가리는가?
  • 교수신문
  • 승인 2020.06.1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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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스케치한 물의 흐름. 종잡을 수 없는 물의 태깔을 매 눈으로 잡아채는 다빈치의 솜씨가 기민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스케치한 물의 흐름. 종잡을 수 없는 물의 태깔을 매 눈으로 잡아채는 다 빈치의 솜씨가 기민하다.

 

골똘할 때는 화폭만 쳐다보며 손가락도 까딱 안 하다가 웬걸, 영감이 스치면 동틀 무렵부터 해 질 녘까지 끼니를 잊고 붓을 휘둘렀다는 사내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다. 가히 몰아치기의 달인답다. 그뿐인가, 다 빈치는 사방팔방도 성에 덜 찬 ‘십육방 미인’이다. 예술이건 과학이건 참견하지 않은 데가 없다. 뇌 속이 워낙 요지경이라 뇌피셜이 기어코 오피셜이 된 사례가 생애에 즐비하다.

다 빈치는 쑥덕공론하는 자연에 혼이 팔렸다. 자연이 조화부리는 갖가지 꼴과 짓거리에 유난히 눈 귀가 쏠렸다는 얘기다. 패턴을 붙잡는 그의 능력은 자별나다. 벽에 남은 얼룩이나 돌에 생긴 무늬 따위가 아무리 하찮게 보여도 금세 머릿속에서 산과 강, 나무와 평야로 번안해낼 줄 알았다. 종소리마저 글자로 바꾸어 인지했다. 활짝 열린 공감각의 세계에서 노닌 셈이다. 허풍이 아니라, 그의 스케치 더미가 똑똑한 물증이다. 그중에서 누가 봐도 혹할 만한 게 물 스케치다.

다 빈치는 물 흐르는 모양을 낱낱이 그렸다. 이를테면, 소용돌이도 가지가지다. 위는 넓은데 밑이 좁은 소용돌이, 밑이 넓고 위는 좁은 소용돌이, 기둥을 닮은 소용돌이, 서로 부딪는 두 갈래의 물 사이에 형성된 소용돌이 등등…. 흐르는 물이 연출하는 각양각색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냥 옮겨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꼬치꼬치 설명을 달아놓았다. 놀라운 것은 ‘필선(筆線)’이다. 재빨리 지나가는 물줄기를 눈 깜박할 새 낚아채는 다 빈치의 드로잉은 흉내 내기 어려운 공력을 자랑한다. 재밌게도 물 모양이 헤어스타일과 흡사하다. 스트레이트파마가 있는가 하면 뽀글뽀글한 웨이브도 보인다. 심지어 조선 처녀의 귀밑머리와 대장금의 얹은머리까지 나온다. 눈썰미 있는 분은 물을 그린 필선에서 ‘자화상’에 나온 그의 얼굴이 겹쳐질 테다. 굼실굼실한 다 빈치의 수염이 마법사 간달프의 휘날리는 수염에 필적한다.

‘그까짓 물’이라 하지 마시라. 다 빈치는 물을 물로 보지 않은 원조 서양화가다. 그는 물이 자연의 원동력이라고 설파했다. 다 빈치는 운을 뗀다. ‘물은 바다와 합칠 때까지 쉬지 않는다.’ 듣고 보니 공자 말씀과 판박이다. ‘무릇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아서 밤낮으로 쉬지 않는구나.’ 다 빈치는 덧붙인다. ‘물은 살아 있는 물체들의 확장이자 기질이다.’ 이 말은 맹자의 낌새를 풍긴다. ‘물을 관찰할 때는 여울을 보라. 물은 파인 곳을 채우고 나서 흘러간다.’ 다 빈치는 또 강을 지구의 피로 보았고, 물길을 인체의 혈맥이라 여겼다. 세상에, 이토록 동양적인 다 빈치라니! 예부터 동양화가들이 읊조렸다. 바위산은 골상이요 강물은 핏줄이며, 나무와 풀은 머리털이자 안개는 입김이라고. 한술 더 떠 산을 아예 사람으로 각색하기도 했다. 봄 산은 미인(美人), 여름 산은 맹장(猛將), 가을 산은 고인(高人), 겨울 산은 노승(老僧)이랬다.

저 명민한 다 빈치의 유선(streamline)은 물의 본디 심성에 다가가려는 모색이다. 후대 서양화가들은 그런 궁리를 까무룩 잊은 듯하다. 갈피 잡기 힘든 물의 요동을 그리면서도 상투적인 명암 대비와 물거품 묘사로 주저앉는다. 번하게 고식적인 포름이다. 바다 풍경화의 창시자로 추앙받는 네덜란드의 헨드리크 프롬의 감상에 겨운 물결 표현이나 영국의 바다 화가 윌리엄 터너의 비누 거품 같은 물감 치레는 수심(水心)을 포착하려는 다 빈치의 패턴 탐구와 거리가 멀다. 클로드 모네가 해 뜨는 바다를 그린 ‘인상, 해돋이’는 당시 ‘인상주의’라는 조롱에 찬 악평을 불러낸 그 작품이다. 모네는 촐랑대는 물결을 짧게 끊어치는 붓질로 마감한다. 명멸하는 광경을 서둘러 묘사하고픈 조바심이 그 붓에 묻어 있다.

가쓰시카 호쿠사이, ‘가나가와 파도 속으로’, 1830~1832년, 채색 목판화, 25.7×38㎝,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세계 여러 미술관에 소장된 이 판화는 찰나의 미학이 일본적이다.
가쓰시카 호쿠사이, ‘가나가와 파도 속으로’, 1830~1832년, 채색 목판화, 25.7×38㎝,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세계 여러 미술관에 소장된 이 판화는 찰나의 미학이 일본적이다.

이제, 참 바다로 저어나가자. 다 빈치의 도타운 벗은 피렌체가 아니라 에도(江戶)에 있었다. 보라, 이토록 다이내믹한 물 그림이 서구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일본의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솟구치는 파도 하나로 불멸의 스타가 된 작가다. 그의 목판화 ‘가나가와 파도 속으로’는 일본 문화의 시그니처로 등극했다. 자칭 ‘친일파’인 마네, 모네, 고갱, 반 고흐 등이 보고 한눈에 홀딱 반한 그 그림이다. 누구는 이 장면을 ‘거대한 바다의 재채기’라고 흰소리한다. 다가드는 쪽배를 한입에 삼킬 듯이 물너울이 내리찍는다. 새하얀 등짝에서 떨어지는, 반 고흐의 육성을 빌리자면, ‘파도의 발톱’처럼 생긴 포말, 그 앞으로 눈송이처럼 산산이 흩어지는 비말…. 울컥하는 바다의 심사를 극적으로 줌업한 그림 아닌가. 인상파 화가들이 너도나도 눈에 콩깍지가 씐 이유가 뭐겠는가. 까놓고 말해, 호쿠사이의 스웨그(swag) 넘치는 조형에 맛이 확 가버린 거다. 낭만적인 과장, 드라마틱한 포치, 새뜻한 설색(設色) 등에 회가 잔뜩 동했고, 면보다 선이 이룩해내는 일루전에 그들은 꼼짝없이 포박당했다.

호쿠사이의 파도는 판타지다. 하여 내 눈에 일본 미학의 밈(meme)이 어른거린다. 찬란한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몽환포영(夢幻泡影)처럼 사라지는 덧없음 말이다. 찰나와 무상으로 짓쳐들어가는 나뭇잎 배의 파탄은 갈급한 탐미주의의 옥쇄(玉碎)처럼 보인다. 여기서 짚고 넘어간다. 물의 발톱까지 그려낸 호쿠사이의 필의(筆意)는 동양 전통에 비추어볼 때 그리 호들갑스레 칭송할 창안이 아니다. 남송의 화원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마원(馬遠)은 물을 가지고 노는 데 도가 튼 ‘물판의 노름마치’다. 마원이 남긴 12쪽의 ‘수도(水圖)’는 요즘 화가가 봐도 기함할 경지다. 거기엔 뭐가 나오나. 물낯과 물빛, 물결과 물살, 물숨과 물김, 물띠와 물내가 몽땅 다 그려져 있다. 다 빈치보다 수백 년 앞선 위업이자 호쿠사이의 회계에서는 쏙 빠져버린 빚이다.

기나긴 강의 물비탈, 늘어선 구름 아래 물굽이, 중중첩첩한 물고랑, 그리고 앵돌아서는 가을 물까지 일일이 구분해서 그린 마원은 물의 본색을 파노라마처럼 펼친다. 눈여겨볼 것은 터치, 이른바 ‘준법(皴法)’이다. 흔히 ‘필획’과 혼용하는 ‘준’은 한갓 붓 자국이 아니다. 그 뜻이 ‘주름살’이다. 바위와 물을 뼈와 피로 삼는다면 거기에 살결을 입히는 붓질은 마땅하다. 산수를 주름지우는 특유의 터치, 곧 준법은 서양화의 색과 면에 맞서는 동양화의 비급(祕笈)이다. 이러니 그 붓놀림이 여북하겠는가. 두보가 읊은 ‘열흘에 물 하나 그리고(十日畵一水) / 닷새에 돌 하나 그리네(五日畵一石)’라는 구절이 화가의 고단함을 실토한다.

‘산에 기봉(奇峯)이 있듯이 물에도 기봉이 있다. 사나운 바람이 불면 물결이 산을 밀쳐버리듯 일어나고, 바다에 달이 처음 뜨는 곳은 조수가 백마가 달리는 듯하다.’ 18세기 동양화의 교과서라 불린 ‘개자원화전(芥子園畫傳)’에 나오는 대목이다. 바다 그림은 오로지 야단법석 떠는 물결 묘사에 입맛이 당긴다. 

바야흐로 조선 그림으로 넘어가보자. 현재(玄齋) 심사정의 바닷물은 어떤가. 그의 담채화 ‘선유도(船遊圖)’는 호쿠사이 작품에 비하면 물장구 놀음에 그친다. 하지만 통찰할 게 있다. 바로 물의 기색이다. 거대한 호쿠사이의 파도에는 타나토스의 음기가 기웃댄다. 들며 나거나 엎치락뒤치락하는 현재의 수파는 정반대다. 오롯이 다정다감하여 발랄한 생기가 신명을 돋운다. 

심사정, ‘선유도’, 1764년, 종이에 담채, 27.3×4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뱃전에 부서지는 물살조차 정답다.
심사정, ‘선유도’, 1764년, 종이에 담채, 27.3×4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뱃전에 부서지는 물살조차 정답다.

현재의 뱃놀이는 바다 한가운데로 흘러간다. 그림이 물에 흠씬 젖어 연푸른 물감이 번졌다. 화급한 소용돌이가 일엽편주를 겁주지만 선비들은 태연히 ‘어디 한번 놀아보세’ 한다. 부윰하게 가로지른 물안개 때문에 바다의 둘레와 물길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다. 소품이지만 화가의 노련한 화면 경영술이 유감없이 드러났다. 배에 실은 기물은 못 말리는 승객의 풍류를 까발린다. 꽃이 꽂힌 화병, 서안에 놓인 서책들, 멋들어지게 휜 나뭇가지, 어디서 날아온 이마 붉은 학 한 마리…. 리얼리티를 냉큼 저버린 화가의 꿈결이 사공의 노를 따라 출렁거린다.

이물에 기댄 저 사내의 음풍이 내 귀에도 들린다. ‘칼을 뽑아 물을 베어도 물은 다시 흐르고(抽刀斷水水更流) / 술잔 들어 시름 녹이지만 시름은 다시 오리니(擧杯銷愁愁更愁) / 세속의 인생살이가 뜻과 맞지 않으니(人生在世不称意) / 내일 아침 머리 풀고 쪽배로 나아가야지(明朝散髮弄片舟)’ 아무렴, 칼로 베어도 베어지지 않는 물을 무슨 수로 그림에 가두겠는가. 무참하구나, 붓 잡은 화가의 손이여. 어렵고 힘들구나, 물의 마음이여.

손철주 미술평론가국민일보 기자, 학고재 주간 등을 지냈다. 교양미술서 베스트셀러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의 저자다.
손철주 미술평론가, 국민일보 기자, 학고재 주간 등을 지냈다. 교양미술서 베스트셀러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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