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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는 왜 급속히 몰락했는가
아시아는 왜 급속히 몰락했는가
  • 정안기 고려대
  • 승인 2003.12.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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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서평 : 『리오리엔트』(안드레 군더 프랑크 지음, 이희재 옮김, 이산 刊, 2002)

정안기 / 고려대·경제사

최근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근대 세계경제사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이 모색되고 있다. 종래 인류사의 보편으로써 서구중심주의적 세계사관과 구미제국주의에 굴복하는 피동적이고 정체론적인 아시아 사상에 대한 편견의 수정 그리고 현재진행형으로써 글로벌리즘에 대한 새로운 역사상의 확보이다. 이는 세계사상의 중심으로서 서구가 아닌 다양한 세계의 일 지역(주변)으로서의 서구의 존재와 서구중심사관에 입각한 ‘세계사’가 아닌 새로운 인류 전체사로서 ‘글로벌 히스토리’의 구상이다.

이 책의 저자 안드레 군더 프랑크(73세, 미국 노스웨스턴대 원로교수)는 1970∼80년대 세계 학계를 풍미했던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의 창시자이며, 1980년대 한국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한국자본주의논쟁의 이론 틀을 제공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프랑크는 저개발국의 근대화론 혹은 공업화론이 난무했던 1960년대 당시 정치경제학의 시점에서 라틴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하는 제3세계의 저발전을 저개발국 내부의 봉건제가 아닌 서구자본주의의 수탈과 세계체제의 종속적 지위로서 파악한 ‘저발전의 발전(1969)’으로 세계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의 문제의식을 더욱 발전시켜, 글로벌 3중 구조론의 근대세계사를 구상한 것이 잘 알려진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시스템론’이다. 그러나 실제로 프랑크 자신을 비롯하여, 월러스틴 이론의 가장 약한 고리는 역시 아시아였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 아시아NIEs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의 뚜렷한 경제발전과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아시아의 지위 그리고 장래에 대한 기대치가 급속히 상승하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그러나 아시아경제 발전을 비롯한 세계경제 변화에 가장 먼저 반응한 연구자가 또한 프랑크이기도 하다.

서구중심사관의 수정과 아시아의 복귀

프랑크는 이 책을 통해서 ‘자본주의vs사회주의’ 혹은 ‘서구vs비서구’라고 하는 20세기 역사관의 한계를 넘어, ‘서구문명vs아시아문명(중국)’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시아’의 독자적인 문명세계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하고자 한 최근에 보기 드문 논쟁적인 대작이다. 프랑크는 이미 1995년 센더슨이 편집한 ‘제 문명과 제 세계시스템(Civilizations and World Systems)’ 가운데 ‘근대세계시스템론의 재고-브로델, 월러스틴 비판-’을 게재해, 절친한 연구 동료이기도 했던 월러스틴의 유럽중심주의적 세계시스템론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프랑크는 현재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과거 유럽중심사관의 연장으로서 현대세계가 아닌 아시아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세계질서와 이에 정합적인 포스트세계시스템론을 주장하였다. 바로 포스트세계시스템론의 연장으로 아시아 중시의 글로벌사관(Globalogical)을 제시한 것이 ‘리오리엔트’이다. 이 책은 1400-1800년까지의 아시아 중심의 세계경제에 대한 전체적인 분석을 통하여, 탈유럽중심사관의 논쟁적인 문제제기와 함께 독창적인 논리로 장기 아시아 근대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한편의 대하 역전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이 책은 한국에 앞서 일본(山下範久 옮김, 'リオリエント', 藤原書店 刊, 2000)과 중국(劉北成 옮김, '白銀資本', 中央編譯社 刊, 2000)에서 번역·출간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제목 리오리엔트는 세계사의 중심으로 아시아의 복귀(re-Orient)와 서구중심사관의 수정(re=orient)의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른바 ‘아시아 르네상스(Asia Renaissance)’시대의 도래를 예감하게 하는 주제설정이라 할 수 있겠다. 먼저, 제1장 ‘현실의 세계사와 유럽중심적 사회이론과의 대결’에서는 ‘17-18세기 서구 기원의 세계시스템이 나머지 비서구세계를 포섭해 가는 과정으로서 근대 세계체제의 형성’이라고 하는 상투적인 유럽중심의 근대세계사 패러다임에 대해 프랑크는 인류사 중심의 글로벌패러다임(탈서구중심사관)으로 그 방법론적인 대결구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즉 브로델, 월러스틴이 주장하는 의미에서 서구가 세계경제 혹은 세계시스템 가운데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고 단언하고, 1800년 이전 세계경제와 그 문명의 중심은 아시아였다는 주장이 본서의 주요 논지이다.

그렇다면 세계경제가 아시아(중국)를 중심으로 어떻게 물자가 글로벌하게 교역되고, 중국은 어떻게 교역수단인 화폐량(은화)의 50%나 흡수할 수 있었는가를 제2장 세계무역의 회전목마’와 ‘화폐는 세계를 돌면서 세계를 돌게 한다’는 제3장에서 검토하고 있다. 먼저, 제2장에서는 1400∼1800년에 걸친 글로벌한 교역망을 세계지도로 제시하면서 세계를 4개의 지역(대서양지역, 아프리카·서아시아지역, 인도양지역, 아시아지역)으로 나누어 각 각의 물산루트와 교역실태를 묘사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세계무역의 중심은 중국을 비롯한 인도, 동남아시아,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해역무역이었으며, 유럽을 시작으로 세계의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동아시아지역, 동남아시아해역에서 화교를 비롯한 일본상인의 활약 및 유럽을 능가하는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 도시의 현저한 발전상을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당시 글로벌한 물자교역을 촉진한 기축통화는 은화였으며, 은화의 주요 공급자는 스페인령 남아메리카와 일본이었다.

이들 은화의 대부분은 최종적으로 아시아,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그 가운데 스페인을 통해서 유럽으로 유입된 은화는 가격혁명을 유발하면서 유럽 각국의 군비증강과 용병 비용으로 충당되었던 반면, 영국과 네덜란드로 유입된 은화는 아시아 물산의 구매에 지출되었다. 반면, 유럽과의 교역을 통해서 중국으로 유입된 막대한 양의 은화는 중국경제의 기저적인 확대와 함께 급속한 생산력 발전을 견인하였다는 것이다.

19세기 이전 세계경제의 중심지

한편, 그와 같은 산업혁명 이전 아시아가 세계경제에서 차지한 압도적인 지위를 유럽지역과 비교시점에서 인구, 생산, 생산성, 소득, 교역지표를 통해서 밝힌 것이 제4장 ‘글로벌 경제-비교와 관계-’이다. 인구사 연구는 이미 세계주요국의 역사연구 가운데서도 가장 진전된 분야이기도 한데, 이 시기 세계인구에 차지하는 유럽인구는 약 10∼20%에 지나지 않았던 반면, 아시아 인구는 50∼70%에 달하였으며, 인구증가율도 역시 아시아가 훨씬 높았고 생산측면에서도 세계총생산의 5분의 4를 차지하였다는 것이다.

▲'銀貨'의 최종 관문이었던 중국은 경제 팬더멘탈의 지속적 확대를 통해, 서구를 압도하는 독자적 경제교역권을 확립했다. ©
더구나 아시아문명의 3대 수공업은 면직물, 견직물, 보석세공품을 포함한 금속가공, 도자기, 유리제품이었다. 이에 비교하여, 1500∼1800년대에 걸쳐 유럽의 유일한 교역상품은 화폐였으며, 그것도 단지 식민지 아메리카에서 획득한 은화에 불과했다는 지적이다.

다음은 생산력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급속한 몰락과 당시까지 세계의  후진지대였던 서구의 발흥을 다룬 것이 제5장 ‘횡으로 통합된 거시사’와 제6장 ‘왜 서양은 (일시적으로) 승리했는가’다. 프랑크는 17세기 위기의 세계적인 동시성에 주목하면서 아시아의 후퇴와 몰락을 500년 주기의 장기파동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종래 경제사 일반이 공유해 왔던 서구의 충격에 의한 아시아의 몰락을 부정하고 아시아의 몰락은 이미 서구의 발흥에 선행했다고 주장한다. 즉, 인도 뱅갈지역의  직물업은 물론이고 중국(청조)도 이미 1720년경부터 은 수입이 격감하였고, 그 후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고 한다. 또한, 1870년 유럽의 발흥과 그 원동력에 대해서 미국의 은과 노예 그리고 노예플랜테이션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미국으로부터 획득한 막대한 양의 은이 풍요로운 아시아역내 교역권으로의 진입을 수월하게 하였고, 유럽은 단지 세계를 누비는 거간꾼으로 막대한 유통이익을 획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럽의 발흥은 단지 아시아의 쇠락에의 편승과 그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제5장에서 다룬 아시아의 몰락과 관련한 후퇴선행론은 서양의 발흥을 어느 시점을 잡는가에 따라 그 결론은 상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제6장에서 다루고 있는 유럽의 발흥과 관련한 은화결정론적 이해는 전체적으로 그 설득력이 매우 약하다. 오히려 문제의 소재는 동양의 후퇴와 서양의 발흥과의 관련성 여부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발흥의 최대 원동력은 단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획득한 은화만이 아닌 아시아문명의 충격, 그 대표적인 물산이라고 할 수 있는 면직물, 차 등이 유럽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즉, 서구의 아시아문명에 대한 강렬한 憧憬이 서양의 발흥을 촉발시켰고, 아시아물산에 대한 수입대체화의 일환으로 면방적업 중심의 생산혁명(산업혁명)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산업혁명의 달성에 의해 획득한 유럽의 높은 생산력이 시장경쟁을 통해 아시아의 수공업적 생산력을 상대적으로 후퇴시켰다는 아시아 충격론(Oriental Impact)이 오히려 서양의 발흥과 아시아의 후퇴를 보다 정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획기적 문제제기, 그러나 빈약한 실증성

이상과 같이 이 책은 획기적인 문제제기와 뛰어난 학문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프랑크 자신의 실증적인 발견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즉, 종래 경제사에 관련한 광범위한 2차 문헌을 아시아라고 하는 시각과 독자적인 문제의식에서 재구성한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프랑크가 거둔 최대의 업적은 종래 유럽중심주의라고 하는 ‘서구=근대’의 도식적인 등치구도(예외성과 보편성)를 부정하고 그 ‘지역성(region)’을 분명히 한 점일 것이다.

월러스틴도 반론에서 평하고 있지만, 아시아문명이라고 하는 거대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급격한 서구의 발흥은 역사적 우연에 불과한 하나의 기적(European Mircale)이었으며, 이 기적의 해명이야말로 이 책의 최대의 성과이며, 유럽의 특질을 보다 분명히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프랑크는 서구와 아시아를 문명사적으로 상대화시켜 종래 아시아 개념을 재검토함으로서 근세 서구와 비서구의 분절화된 시각(유럽중심사관)의 비판과 세계시스템론과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공간적 단위로서 ‘지역성’을 적출했다는 점에서 그 공헌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2000년 이 책의 번역, 출간과 함께 일본학계를 반응은 어떠한가. 일본학계는 이미 프랑크에 앞선 문제의식으로 1984년 사회경제사학 전국대회(당시 공통논제는 아시아교역권의 형성과 구조)를 통해서 이른바 아시아교역권 논쟁이 촉발하였다. 즉, 서구의 아시아 진출과 관련한 아시아교역권의 존재여부, 전근대와 근대의 ‘연속vs단절’, 서구의 충격에 의한 아시아간 무역의 평가여부 등 첨예한 논점과 수차례에 걸친 활발한 학술논쟁을 통해서 치밀한 실증에 입각한 획기적인 연구 성과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일본문명론의 가와카츠 헤이타(川勝平太), 중화조공시스템론의 하마시타 다케시(浜下武志), 아시아간무역론의 스기하라 카오루(杉原 薰)가 일본학계의 세계경제사, 아시아경제사를 주도하는 3인방으로 논의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일본학계는 이 책에서 보여준 프랑크의 평가는 그 스펙트럼이 다양하지만 전반적으로 호의적이다. 그 이유는 아마 프랑크의 작업이 서구세계에서 최초의 아시아사상에 대한 포괄적이고 정당한 평가이며, 그 동안 일본학계가 거둔 연구시각과 방법론이 드디어 유럽의 시민권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간주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서구문명vs중국문명’이라는 세계사의 중심으로써 중국 중시의 시각과 장래 중국 중심의 아시아경제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이다. 그 가운데 일본문명론을 주장해 온 가와가츠 헤이타는 해양사관과 물산복합론에 기초하여, 세계적으로 독자성을 갖는 일본문명을 서구문명과 상대화시켜, 일본근대는 서구의 충격이 아닌 ‘아시아 충격=탈아시아’를 통해서 근세로부터 근대일본으로 이행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즉, 유럽을 비롯한 세계 근대문명의 탄생비밀은 프랑크가 제시한 리오리엔트(Re-Orient)가 아닌 디오리엔트(De-Orient)야말로 근세로부터 근대세계로 이행의 본질이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프랑크의 리오리엔트는 금후 일본학계가 주도하는 아시아경제사 연구의 커다란 촉진제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또한, 금후 이 책에 대한 서구학계의 반응과 뿌리 깊은 서구중심사관이 어떻게 몰락할지의 여부도 큰 관심거리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세계사학회를 비롯한 다수의 학술상을 수상하였으며, 세계경제사와 아시아경제사 연구 가운데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어쨌든 국내에서 번역이 좀 늦은 감이 있지만 크게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이 제기하는 문제의 요지는 한국학계에 대해서도 상당한 충격이 아닐까 한다.

이미 막대한 연구인력과 연구축적에도 불구하고 일국사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사학계의 연구동향과 과도한 민족주의에 발목 잡힌 배타적인 역사관, 아직도 구태의연한 유럽중심사관에 사로잡힌 자본주의맹아론 등의 질긴 생명력과 획일적인 연구동향을 고려한다면, 한국학계에 대해서도 그 수용여부와 무관하게 커다란 파문이라 할 수 있겠다.

즉, 정보화, 세계화를 특질로 하는 21세기의 세계사상 속에 그 하나의 퍼즐조각에 불과한 한국사(한반도지역)를 어떻게 끼워 넣을 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역사학계를 비롯한 인문사회과학계열 전공자들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근대사 혹은 글로벌리즘의 역사상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또한, 이 책과 관련해서 함께 읽어 볼만한 책으로는 스기하라 카오루의 '아시아간 무역의 형성과 구조'(박기주 옮김, 전통과현대 刊, 2002)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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