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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지구사 
냉전의 지구사 
  • 조재근
  • 승인 2020.06.05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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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지구사 
냉전의 지구사 

 

오드 아르네 베스타 지음 | 옥창준 외 3명 옮김 | 에코리브르 

냉전은 어떻게 전 지구적 현상이 되었을까. 이는 이 책 원서의 부제인 3세계의 개입과 현대의 형성(Third World Interventions and the Making of Our Times)’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3세계에 개입하는 주체는 냉전기의 두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이다. 18세기부터 1960년대까지를 다루는 이 책의 전반부는 미국과 소련 중심의 지구사에 집중한다. 요컨대 지금까지 많은 연구들이 냉전의 주체로서 미국과 소련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가정하고 두 나라가 유럽에서 경쟁하는 것을 다루어왔다면, 이 책은 미국과 소련의 역사를 먼저 서술한다.

베스타는 미국과 소련을 유럽사의 확장판이 아니라, 보편적 가치(자유와 정의)를 담보한 제국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냉전이 단순히 유럽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힘의 패권이 교체되는 시기가 아니라 제국주의가 제국 간 경쟁으로 바뀌는 시대 자체의 변화이며, 미국과 소련이라는 특수한 나라가 국제 정치를 이끌어갔기에 냉전이 비로소 지구화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이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유럽 제국주의는 위기에 봉착했다. 유럽이 위기에 빠지자 비유럽 지역에서 탈식민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 미국과 소련이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미국은 자유라는 가치에 의거해 유럽의 식민 지배를 부정적으로 인식했으며, 소련은 정의라는 관점에서 유럽 중심의 기존 질서를 혁파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탈식민 독립 운동가들에게도 미국과 소련은 매력적인 존재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다시금 식민 질서를 복원하려 하자 탈식민 독립 운동은 이에 맞서 저항했고, 미국과 소련은 적어도 유럽 제국주의 편에 서지는 않았다. 또한 미국과 소련은 제3세계 지역을 직접 지배하지 않았다. 다만 제3세계의 정치·사회적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냉전기 비유럽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과 내전은 미국과 소련의 개입과 함께 봐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제3세계 개입만을 다루었다면, 이 책은 미국사와 소련사에 대한 저자의 독창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같은 학문적 명성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Third World Interventions’의 뜻은 3세계에 대한 개입이기도 하지만 3세계의 개입을 뜻하기도 한다. 이 책 후반부는 제3세계가 어떻게 미국과 소련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이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가 어떻게 역동적으로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베스타는 미국과 소련의 제3세계 개입 과정에 제3세계 엘리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꼼꼼한 외교 문서 분석을 통해 살피고 있다. 냉전기 제3세계의 집권자나 반대파 모두 미국과 소련이라는 동맹국을 선택할 수 있었다. 적의 적은 나의 편이라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통용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국과 소련의 세력 균형이 유지되더라도 제3세계는 자주 내전과 혁명에 돌입했고, 3세계의 판도 변화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세력 균형이 흔들리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이와 같은 관점 아래 냉전은 점점 더 미국과 소련만의 이야기를 넘어선다. 중화인민공화국, 쿠바, 베트남이 등장하고 냉전을 다루는 베스타의 시선은 한층 넓어진다. 앙골라 내전과 에티오피아 혁명을 돌아보고,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일련의 위기가 미국과 소련의 데탕트를 어떻게 무너뜨리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이어지는지를 살펴본다.

베스타가 특히 주목하는 시기는 1970년대다. 이때 제3세계는 각기 민족주의, 사회주의, 이슬람주의라는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하거나 이 중 몇 가지를 조합하는 선택을 내린다. 그리고 1970년대의 선택이 남긴 성공과 실패의 유산이 미국과 소련뿐 아니라 제3세계를 포괄하는 현대 세계를 형성했다고 본다. 그 결과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수렁에 빠져 몰락의 길로 들어섰고, 레이건 행정부의 선택은 제3세계의 여러 국가를 무너뜨리고 이어 소련의 변화와 몰락에도 영향을 주었다.

냉전기에 직면했던 이와 같은 문제는 소련의 해체 이후 완전히 끝났을까?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미국의 개입주의와 제3세계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략 그리고 이후의 이슬람 국가 등장, 현재까지 계속되는 미국-이란의 갈등 등에서 알 수 있듯 미국은 여전히 제3세계 문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전과 같은 제3세계주의의 깃발은 존재하지 않지만, 난민 문제를 비롯해 제3세계에서 출발한 여러 문제는 이제 다시금 미국과 유럽 그리고 동아시아라는 중심부에도 일종의 되먹임(feedback)을 주고 있다. 여전히 제3세계의 개입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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