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30 00:40 (토)
감염의 전장에서
감염의 전장에서
  • 교수신문
  • 승인 2020.06.05 09: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감염의 전장에서
감염의 전장에서

 

토머스 헤이거 지음 | 노승영 옮김 | 동아시아 

이 책은 세균 감염이 당시 과학자와 의학자들에게 어떤 위협이었는지, 독일, 영국, 미국, 프랑스 같은 국가와 거대 제약회사는 이 도전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입체적으로 묘사한다.

일단 파스퇴르의 연구 덕분에, 세균이 감염병의 원인일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전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병균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발상을 하기 어려웠다. 코흐의 연구를 통해 각각 다른 세균이 디프테리아, 결핵, 탄저병, 폐렴, 파상풍, 콜레라 등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하지만 질병이 세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을 알아내는 것과 세균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영국의 의학자 암로스 경은 세균 자체를 박멸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감염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상하거나 괴사한 조직에서 병균이 번성하니 문제가 될 부위를 과감하게 절단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때만 해도 특정한 병원균을 공략해서 없앤다는 아이디어에 동의하지 않는 의사들이 많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의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환자가 세균에 감염되지 않도록 보호하고, 감염되었다면 인체가 그 감염과 싸워 이겨낼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었다.

한편 독일의 제약회사 바이엘에서는 발명만 한다면 대박을 낼 수 있는 ‘마법 탄환(Zauberkugel)’을 찾아내기 위한 연구에 착수한다. 질병을 일으키는 유기체와 세균에만 작용해 환자의 몸속에서 안전하게 감염을 막아낼 수 있는 약물 개발에 나선 것이다. 당시에는 그런 약물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기 때문에 ‘마법 탄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몽상가들의 꿈이 결실을 보게 된 셈이다.

설파제가 발명된 후에는 설파제 사용과 유통, 특허권 등을 둘러싸고 독일, 프랑스, 미국 등에서 다양한 논란이 일었다. 독일 제약회사 바이엘이 만든 설파제를, 영국의 권위 있는 의학자가 대규모 시험을 해서 효능을 인정하고,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에서는 작용 기전을 밝힌다. 미국에서는 각종 카피약이 판매되다가 부작용으로 커다란 물의를 일으킨다. 하나의 약이 발명되고 상용화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건과 맥락이 교차된다. 그리고 그 약은 세상을 바꾼다.

연쇄구균이 일으키는 다양한 세균 감염에서 설파제는 놀라운 효능을 보여준다. 설파제가 보급되면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대표적인 것이 산욕열로 인한 산모 사망이다. 산욕열은 병원에서 출산하는 많은 산모를 희생시켰다. 산욕열이 유행한 운 나쁜 해에는 감염된 산모 네 명 중 한 명이 목숨을 잃을 정도였다. 산욕열의 원인이 연쇄구균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는, 산욕열 감염의 3분의 2가 ‘무증상 보균자’인 의료인에 의해 일어난다는 연구 결과도 발표된다. 병원에 수많은 무증상 보균자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무증상 보균자를 차단하는 다양한 노력을 한 끝에 산욕열 발병률을 낮게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간헐적 유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독일에서 설파제가 개발되고 나서 얼마 후 영국에 소개되는데, 때마침 이 약은 영국의 산욕열 연구를 이끈 레너드 콜브룩의 손에 들어간다. 그는 조심스럽게 환자들에게 설파제를 투약하다가 어느 정도 효과가 드러나자 산욕열에 걸린 환자들에게 대규모로 설파제를 처방하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당시 세계 최고 시설을 갖춘 그의 병원에서 산욕열로 치료를 받던 산모 네 명 중 한 명은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설파제를 투입한 이후 산욕열 환자 64명 가운데 61명이 생존하는 결과를 얻는다. 사망률을 20~30퍼센트에서 4.7퍼센트로 낮춘 것이다. 부작용도 거의 없었다. 산욕열 외에도 성홍열, 신우염, 수막염, 가스괴저, 중이염, 편도염 치료에서 설파제는 효과가 있었다. 그야말로 ‘기적의 약품’이 등장한 것이다.

설파제는 세균 감염을 치료하는 것을 넘어 의사와 병원의 역할을 뒤바꿨다. 항생제 덕에 병원은 환자에게 더 안전한 곳이 되었으며, 주류 의과대학과 병원 사이에는 가장 강력한 약물을 가장 숙련된 의사와 결합해 가장 발전하고 위생적인 돌봄 환경에서 시술하는 동맹이 결성되었다. 1930년대에는 대다수 의료 행위가 환자의 집에서 행해졌다. 병원에서 전업으로 일하는 의사는 16명 중 한 명에 불과했다. 분만의 절반은 가정 분만이었다. 1930년의 평균적 개업의는 일주일에 약 50명의 환자를 보았다. 하지만 1950년이 되자 평균적 의사들은 더 빠르고 강력한 도구로 무장한 채 일주일에 두 배나 되는 환자를 보았으며 그 비율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왕진 제도는 멸종하다시피 했다. 분만의 90퍼센트 이상이 병원에서 시술되며, 대다수 의사가 일을 하는 곳은 병원과 병원 관련 사무실이다. 일반적으로 1930년대 이전의 의료인과 비교할 때, 오늘날의 의사들은 더 훌륭한 훈련을 받고 더 나은 장비를 갖추고 환자에게 투약할 의약품을 더 철저히 통제하고 목숨을 구하는 일에 훨씬 효과적이고 훨씬 서두르고, 그리고 훨씬 부유해졌다.

저자에 따르면 1930년대 이후 설파제 및 항생제가 보급되면서 국가의 역할은 감염 예방에서 의료 신기술 개발로 옮겨갔다. 이건 기본적인 공중보건 요건이 어느 정도 갖춰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치료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의 마땅한 치료제가 없는 상태에서, 국가의 역할은 다시금 예방과 공중보건 강화, 방역에 맞춰졌다. 감염병의 치료제를 찾지 못하면 예방에 힘을 기울이다가, 치료제를 찾고 나면 훗날 다른 감염병이 나타나는 술래잡기가 시작된 것이다. 설파제는 감염과의 전투에서 인간을 ‘치료’한 최초의 약물이지만, 감염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어떤 치료제를 만들더라도 새로운 병이 나타날 테고, 우리는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 대비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토머스 헤이거는 방대한 자료를 조사해 역사 속에 감춰져 있던 설파제 발명의 뒷이야기들을 캐냈다. 그리고 흥미롭고도 유려하고도 이야기들을 엮어낸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당시 병원이나 의약품 개발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생생함이 느껴질 것이다. 손을 뗄 수 없는 스토리텔링은 과학 연구의 현장을 밀도 있게 묘사하면서도 시대적인 맥락을 함께 제시하는 웰메이드 과학책의 전형을 보여준다. 수준 높은 과학ㆍ역사 읽을거리를 원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만족할 것이다. 노승영 번역가의 섬세하면서 깔끔한 번역도 언제나처럼 믿을 만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