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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학술계를 이끈 논문의 주역들
2003년 학술계를 이끈 논문의 주역들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12.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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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저류 읽으려는 시도...깊이와 무게 아쉬워

올 한해 학술계는 ‘담론’보다는 ‘논문’으로 돌아보려 한다. 논문은 담론의 발생지인 까닭이고, 논문을 통하면 발신주체와 그 배경이 좀더 명확히 그려지기 때문이다.
올 한해도 많은 논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정치적 이슈가 강해서인지 정치사회 쪽이 활발했고, 역사학 쪽도 논쟁적 논문들이 많았다.
하지만 논문들의 생명력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어 우려감이 들기도 한다. 한달 이상 공공영역에 머문 글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이슈메이커들은 빠르게 교체됐다.
따라서 화두와 문제의식만 가득 떠 안은 한해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 구체적인 면면을 살펴보면서 올 한해를 대표할 논문을 발표한 10명의 학자들을 선정해봤다. <편집자주>

변화하는 사회상 포착(김용학 연세대 교수)

▲“입시 성적 같은 인적자본이 높은 집단이 여전히 사회 활동, 지위 같은 사회자본도 높다.” 김용학 / 연세대 교수(사회학) ©
김용학 연세대 교수의 두편의 논문이 화제가 됐다. 우리 사회의 ‘연줄주의’를 분석한 ‘인적 자본과 사회자본’에서 그는 국내 엘리트의 출신대학이 서울대(37.1%), 고려대(8.29%), 연세대(6.82%), 성균관대(3.42%), 한양대(2.48%) 순이라고 분석해 지배엘리트 분포가 대학수능성적에 비례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김 교수는 지난 1월에도 ‘인터넷 공간의 구조화’라는 논문을 통해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의 연령대별 인터넷 이용비율 격차가 크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방하남·김기헌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이 공동발표한 ‘한국사회의 교육계층화’도 교육기회 불평등이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음을 실증했다. 김창석 서울시립대 교수는 ‘서울시 상류계층의 주거지역 분포특성과 형성요인’에서 한국의 상류계층 55%가 서울에 살고 있으며 거기서 절반은 강남·서초·송파구 등에 몰려 사는 것으로 분석해 지역별 불균형 심화를 여실히 짚었다. 사회 변동을 포착하려는 시도가 건져올린 건 오히려 바위처럼 ‘꿈쩍않는 사회’였다.

새로운 역사인식(이영훈 서울대 교수)

▲“19세기 들어 조선사회의 경제는 침체하기 시작했으며 농업 생산성이 떨어져 주민소득도 감소했다.” 이영훈 / 서울대 교수(경제사) ©
역사학계 논쟁의 중심에 선 인물은 단연 이영훈 서울대 교수다. 경제사에서 내재적 근대의 ‘싹’을 잘라내는 논문, 국사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하는 논문으로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그외에 노영구 한국문화연구소연구원의 ‘임진왜란 초기 양상에 대한 기존 인식의 재검토’도 화제의 논문이었다.
이들은 관심의 차이에 따라 史實이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론의 대립은 동아시아 종합역사의 구성이라는 새로운 문제틀 속에 편입돼 내년부터는 한결 가열찬 논쟁국면이 형성될 예정이다.

 

 

중요한 발명(견)(황우석 서울대 교수)

▲“광우병이 안걸리는 소와 사람에게 심장과 간을 제공할 수 있는 돼지를 복제할 수 있었다.” 황우석 / 서울대 교수(생명공학) ©
발명은 역시 과학의 몫이었다. 세계 최초로 ‘광우병 안 걸리는 소’와 사람에게 심장·간 등 장기를 제공할 수 있는 돼지 복제에 성공한 황우석 서울대 교수팀의 연구결과가 최정점에 올 듯하다. 특히 황 교수는 한국 생명공학 분야의 건재를 과시했다며 대서특필됐지만,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에서 ‘깜짝쇼’를 펼쳤다며 발표방식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배명진 숭실대 교수(음성공학)의 논문 ‘에밀레종에서 애끊는 종소리 분석 및 재현에 관한 연구’는 이색적 발견이다. 배 교수는 최근 에밀레종에서 애기 우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유가 “종을 치는 당목이 낡아서”라고 분석해 사람들의 혀 차는 소리를 끌어냈다.

 

강렬한 문제제기(김경재 한신대 교수)

▲“1900년의 선교지 분할협정이 한국 개신교의 교파주의 교회중심주의, 보혁 색깔고착 등의 부작용을 가져왔다.” 김경재 / 한신대 교수(신학) ©
올 한해 종교계는 기득권 해체의 목소리를 높였다. 올 2월 이화여대에서 개최된 ‘종교와 사회권력’ 학술대회에서 터져나온 강인철 한신대 교수의 ‘종교권력과 한국 천주교회’, 교회개혁 실천연대 공동대표인 백종국 경상대 교수(정치학)의 ‘바벨론에 사로잡힌 교회’ 등은 후원금 횡령과 부동산 투기에 골몰하고 있는 교회지배권력을 정면 비판해 눈길을 끌었다. 또한 개신교 신학자로서 한국기독교의 분열과 이념적 보수성을 통렬히 질타한 김경재 한신대 교수의 ‘한국기독교의 진보적 민족주의와 보수적 반공주의간의 길항성 연구’는 한국 기독교가 프로테스탄티즘 근본정신으로 복귀하고,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관계성을 한국현대사라는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성찰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소신있는 목소리(류진현 서울대 강사)

어떤 논문이든 소신과 신념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글을 지탱하는 주춧돌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식민지 콤플렉스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친일용인론’은 특별한 소신을 필요로 한다. 안병직 서울대 교수를 중심으로 올 중반기에 학계를 뜨겁게 달군 역사학의 과거청산문제 관련 논문들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질타를 받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진행된 이 담론에서 류진현 서울대 강사의 논문 ‘과거청산과 지식인: 프랑스의 사례’는 주목할 만한 시사점을 제공해 줬다.

오랜 노력의 결실(정용승 한국교원대 교수)

▲"지구온난화로 북극 얼음이 녹아 발생한 수증기가 한반도를 포함한 북반구 강수량에 영향을 준다.” 정용승 / 한국교원대 교수(대기환경) ©
오랜 공력을 들인 논문으로, 정용승 한국교원대 교수가 지난 7년여 동안 컴퓨터 전문가 하로 레 씨와 함께 북극 위성 사진 2천6백54장을 세계 최초로 분석해 정리한 ‘기후온난화와 북극해의 해빙추세’가 단연 돋보인다. 북미대륙에서 대기환경 분야 학자로는 알아주는 실력자인 정 교수의 논문은 “지구 온난화로 북극 얼음이 급속히 녹아 이로 인해 발생한 수증기로 한반도를 포함한 북반구 강수량에 영향을 준다”는 가설을 오랜 시간의 관찰을 통해 증명해냈다는 노고와 일관성이 인정받았다.

 

 

 

주제의 도발성과 시의성(조준모 숭실대, 신정완 성공회대 교수)

논쟁의 씨앗을 품은 논문은 국문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분야에서 다양하게 나왔다. 국문학에서는 김영욱 서울시립대 교수가 2000년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의 인근에서 발견된 목간의 내용이 吏讀로 표현된 가장 오래된 백제시가라는 주장을 펼쳐 기존 ‘정읍사설’과의 알력관계를 형성했다.
경제학에서는 조준모 숭실대 교수의 ‘한국노동조합이 기업의 파산가능성에 미치는 효과에 관한 경제적 분석’이 만만치 않은 파열음을 냈다. 조 교수의 주장인즉, 하위 노조가 상위 노조에 가입할 경우 기업이윤이 떨어진다는 것인데 “노조가 상급단체에 속하지 않은 기업의 이자보상배율이 악화될 가능성은 마이너스(-0.0747)였으나 노조가 상급단체에 속한 기업은 플러스(0.2362)로 나타났다”는 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노동계의 반론이 잇따랐음은 물론이다.
신정완 성공회대 교수(사회학)의 ‘주체적인 학자 양성의 필요성과 방안’은 학문의 대외의존도는 독립성이 강한 학자를 국내에서 꾸준히 배출할 수 있는 제도 마련에서 시작된다는 주장을 펼쳐서 많은 동의를 받았다. 그는 과도한 미국유학, 미국 중심의 사회제도 이식모방, 국내대학원의 空洞化 현상 등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국내박사 할당제, 대학원생의 학습여건 개선 등의 방안을 제시했다.
한국사회의 이념에 대한 성찰시도도 지난 한해 꾸준했다. 특히  한국적 보수와 자유주의에 대해 논의가 이어졌는데, 이 중 홍덕률 대구대 교수, 홍윤기 동국대 교수의 분석들도 관심을 모았다.
박주원 이화여대 연구교수의 ‘자유주의론의 과잉 그리고 자유주의의 위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정치비평’ 상반기호에서 한국에 진정한 자유주의가 필요하다는 식의 주장은 “타락하지 않는 자유주의라는 초역사적 이념형을 설정하는 관념적 논의”라고 최근 자유주의론을 맹렬히 비판하고 나섰다.

특이하고 이색적인 발상(조전혁 인천대 교수)

이색적인 논문으로 주목을 끈 것은 경제학자의 바둑연구였다. 바둑의 착점 결정이 불확실성 아래에서의 투자결정 문제와 유사하다는 조전혁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와 정수현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의 공동 연구는 ‘합리적 기대가설’이 바둑착수에 적용되는 경우를 통계적으로 밝혀냈다. 이를 두고 경제학의 균형 및 한계 개념, 기회비용 개념 등을 바둑분석에 적용할 수 있을 지 얘기들이 오갔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의 개성적인 화법을 통해 한국 정치문화를 성찰한 정윤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의 학술대회 발표문도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 노 대통령의 화법이 단순히 개인적 특징이 아니라 “권위주의 정치문화, 파워엘리트 중심주의, 상명하달식 침묵주의를 파괴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라는 정 교수의 분석은 의미심장했다.

진지한 이론의 모색(김준형 한동대 교수)

▲“미국이 북한을 침공 못하는 건 패배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북한이 남한을 볼모로 잡는 비대칭전의 성격 때문이다.” 김준형 / 한동대 교수(정치학) ©
현실을 이론에 대입시켜 정합적으로 논해보려는 시도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의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은 우리에게, 또 세계에 무엇인가’라는 논문은 기본적으로 미국과 한국에 대한 정세분석이지만, ‘비대칭전’이라는 현대의 전쟁형태를 근거로 한반도의 미래를 그려 설득력을 보였다는 점에서 언급할 만하다.
그리고 유팔무 한림대 교수는 ‘시민사회의 개념과 내부구성’이란 논문에서 하버마스의 시민사회론을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접근, “하버마스의 시민사회에 포함된 ‘경제영역’은 ‘시장’에 국한되고 계급·계층의 갈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점이 지적되지 않은 채 국내에 수용되고 있다”라는 비판을 펼쳤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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