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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수필 : 이렇게 한 해를 보낸다
송년수필 : 이렇게 한 해를 보낸다
  • 김종대 단국대
  • 승인 2003.12.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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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테의 강가에서 포도주 한잔!

김종대 / 단국대·독문학

독일 작가 장 파울(1763∼1825)은 시간이란 큰 공간에 저장돼 있어 사람들이 그 속을 지나간다고 했다. 인간은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흘러가는 방랑자가 아닌가. 시간은 말없이 가만히 있는데 우리가 그 속을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옳을지 모른다.


한 해가 저물 때 우리는 세월이 빨리 지나간다고 느끼는 현상은 할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생기는 조급증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한 해를 보낼 것인가에 대해 기대 반 염려 반으로 한 해를 시작해서 지금은 끝이 날 즈음이다. 시험시간이 끝날 때처럼 이래저래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연말이면 사람들은 제각기 한 해를 뒤돌아본다. 어떻게 살았는지. 뭘 하고 지낸 한 해였는지, 낙제는 아니지만 점수는 별로 신통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도 들 것이다.


필자는 몇 년 전에 대학생활에서 은퇴하고 현재 주어진 시간의 자유를 비교적 누리고 있는 셈이다. 아침 산책은 한해동안 거의 빠지지 않고 해오는 일과다. 걸음이 모든 인간동작의 기본이 아닌가. 나는 산책을 통해 몸의 균형을 잡아보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우리사회는 금년에도 매우 역동적인 변화를 했다.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자면 육체적인 균형과 정신적인 균형을 함께 유지하는 데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여유 있는 산책이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그러한 마음자리에서 한 해를 마감하는 것이 다음 해를 여유 있게 보내는 비결이 될 것을 또한 기대해본다.


나는 집안 청소를 운동으로 여기고 자주 한다. 쓸고 닦고 하는 일이 온몸 운동이 될 뿐 아니라 마음을 닦는 수련이라고 여기고 실천한다. 그런데 매일 아침 하는 일이지만 먼지잡기는 요원한 일인 것 같다. 쓸어 모아둔 미세한 먼지의 양과 물걸레에 묻어나는 검정을 유심히 쳐다보면서 이래도 우리들의 허파가 괜찮을지 염려해본다. 그래도 삶의 공간에서 더럽혀진 마음은 조금 닦였으리라고 믿어본다.


이렇게 대충 내가 거들어야 할 가사가 끝나면 신문을 펼친다. 주변상황이 밤새 어떻게 변했는지 오늘 어떤 일들이 예상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신문을 읽는다. 어느 프랑스인은 신문 읽기란 강아지가 아침에 길을 가다가 주변 상황이 어떠한지 알아보려고 냄새를 맡아보는 행위와 동일하다고 했다. 말하자면 개들도 자신의 활동영역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 후각으로 정보를 수집한다는 뜻일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후세인이 잡히고 국내에서는 정치자금문제로 교도소가 또 다시 성시를 이룰 것 같다.


후진 성격을 지닌 우리나라 정치 풍토에서 정치는 할 사람만 해야지 누구나 할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 땅에는 정치 지망생들이 많으니 다행이랄까? 누구든지 정치는 해야 하니까 말이다. 정치인들은 대개 자신이 역사의 모자이크에서 큰 그림을 그리는 돌들이 되겠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모자이크 돌 조각들이 모여 무슨 형상을 요란하게 만들어가고 있긴 한데 아직은 문제다. 언젠가는 멋있는 작품이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 얼굴이 TV 화면에 자주 비치던 어느 정객이 한동안 뜸 한 채 나타나지 않더니 그 분의 사망기사가 조그맣게 실렸다. 정치도 심포니 오케스트라처럼 여러 소리들이 어울려 멋진 게임이나 놀이문화가 될 수 없을까? 인생은 짧고 정치는 더욱 짧은데 놀이문화는 그나마 길다.


이렇게 신문을 읽고 난 후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면, 유럽의 포도주 문화사에 관한 책을 쓰는 작업을 한다. 구약에 의하면 노아는 홍수가 끝나자 곧바로 산에 올라가 포도나무를 심었다. 유럽인들이 기원전부터 마셔온 포도주를 아직도 마시고 있는 그 맛의 마력은 과연 무엇인가. 그들에게 포도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럽의 문화를 소개한다는 의미에서 포도주에 관한 책을 쓰기로 한 것이 지난 한 해의 중요한 내 과제다.


술, 그 중에서 포도주는 한해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화해하는 분위기를 제대로 연출할 줄 안다. 포도주는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시기 때문에 술 먹고 다투는 일이 없어 좋다. 그래서 연말에 포도주를 한 병 따서 마시면서 내가 알게 모르게 남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용서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잔 마시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살면서 불가피하게 경험하는 고통을 잊어버리고 싶을 때도 약간의 술은 도움이 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레테는 망각의 신이다. 누가 고통스러운 한 해를 보내고 있다면 망각의 레테한테서 잊어버릴 수 있는 축복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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