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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문화 칼럼]‘인권변호사’라는 말의 모순
[김희철의 문화 칼럼]‘인권변호사’라는 말의 모순
  • 김희철
  • 승인 2020.06.03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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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재심(2016) 리뷰
영화 <재심>(2016) 포스터

우리나라의 사법체계는 1심 판결이 억울하다 싶으면 2심 고등법원에서 다시 다투고, 그 2심 결과도 억울하다면 3심 대법원까지 올라가서 최종 판단을 받는다. 그게 끝이다. 아무리 피가 거꾸로 솟도록 억울한 누명을 썼다 해도 전쟁이 터지거나 세상 뒤집히지 않는 이상 판결을 뒤엎을 도리는 없다. 그런데 만약 원판결을 뒤집을 만한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되거나 원판결에 관여했던 법관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이 증명되었을 때 ‘재심’을 신청할 수 있다.

영화는 전라도 익산 ‘약촌’이라는 시골 거리에서 한밤중 발생했던 사건을 극화했다. 약촌오거리에서 택시기사가 어떤 미친놈한테 살해당한다. 이 사건의 누명을 쓰고 15년 복역 후 폐인이 된 청년과 당뇨로 눈멀게 된 엄마가 한 변호사를 만나 재심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누명 쓴 청년 조현우(강하늘 분)이 변호사에게 절규하듯 외친다. “법? 법! 아직도 법 타령이여? 법으로 뭐 할 수 있는디? 저 O벌넘들 잡아넣을 수 있어? 말해봐~!"

변호사 이준영(정우 분) 속물근성을 가진 변호사다. 약자를 보호하거나 공익을 중요시하는 것보다 당장 내 밥벌이가 우선이다. 신도시 아파트 집단소송을 맡았다가 패소해서 오리알 신세가 되자 친구가 다니고 있는 잘나가는 로펌에 겨우겨우 들어간다. 회사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마련된 ‘찾아가는 무료 법률 상담’에 나섰다가 변호사는 문제의 사건 피해자와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 자포자기하고 집에서 술만 먹고 있는 아들 대신 어머니가 뭐라도 해보겠다고 법률 상담을 신청했던 것이다. 

‘재심’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익숙하다. 전라도 진도에 계신 박동운님은 1981년에 간첩단 수괴라는 누명 쓰고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18년 옥살이 후 특별 사면을 받았다. 출소 후 고향 진도에 내려갔더니 감옥보다 더 서러운 차별과 차가운 시선들이 있었다. 박동운은 감옥에 있을 때부터 자신과 가족의 무죄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써서 이곳저곳에 보냈다. 사건 발생 28년 만인 2009년에야 시민단체, 변호사 등의 노력으로 재심을 받을 수 있었다. 나도 그날 다른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들, 시민단체 간사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박 선생님과 가족들의 뒷모습이 보였는데 판사가 “피고 박동운, 무죄”라 외치며 재판봉을 땅! 땅! 땅! 내리치자 선생님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두 손을 천장 향해 뻗으며 “대한민국 만세~!!”를 계속 외쳤다. 그 광경을 보며 거기 있던 사람들 다 눈물 흘리며 껄껄 웃었다. ‘아, 이런 게 너무 기뻐서 우는 거구나’ 느끼며 나도 많이 울었다. 다큐 영화 <무죄>가 워낙 작은 독립영화라 박동운 선생님께 큰 도움 되지는 않았지만 선생님은 늘 나를 친아들처럼 대해 주셨다.

박동운, 다큐멘터리 영화 <무죄>(2007) 중에서

인권 변호사라는 말이 있다. 모순된 말이다. 변호사는 기본적으로 인권 변호사여야 한다. “변호사법 제1조,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 의뢰인의 인권이 보장되도록 변호하고 그 다음 돈이고 명예고 보호해 줘야 한다. 인권을 무시하고 보상금이나 많이 받게 해주면 만사해결이라고 생각하는 변호사는 직업란에 ‘브로커’라고 쓰는 것이 낫다. 재벌 이익이나 보호하고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들 대변하는 소위 잘나가는 로펌 변호사들은 그냥 돈 버는 직업인이지 ‘변호사’가 아니다. 변호사는 무릇 측은지심이 있어야 한다. 

영화 <재심>은 변호사나 법조인이 되려고 하는 로스쿨 학생들, 현직 법조인들이 필 시청해야 한다. 영화 마지막 자막에 실제 모델 박준영 변호사와 진범을 잡으려고 노력했던 황상만 반장, SBS 이대욱 기자 등에게 경의와 감사를 표하는 것처럼 뒤늦게 시청한 관객의 한 명으로서 <재심>을 만들기 위해 고생하신 스텝분들과 감독님께 경의를 표한다.

김희철
<잠깐 운전하고 오겠습니다> 저자, 서일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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