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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31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31
  • 김용준 교수
  • 승인 2003.12.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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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일흔에 '씨알의 소리'를 낸 까닭은

 

 <씨알이란 말은 유영모(柳永模) 선생님이 하셨는데, 아마 6·25전쟁 후일거요. 지금 잘은 모르겠으나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한동안 YMCA가 지금의 집 짓기 전에 임시로 바라크 모양으로 짓고 있어서 현동안 씨(당시 YMCA총무-필자 주)가 'Smallest YMCA in the world'라고 하던 때에 그 집에서 목요일마다 '목요강좌'라고 해서 말씀을 해주셨지요. 그 강좌에서 한동안 사서(四書) 중의 하나인 [대학]풀이를 하셨는데 그 맨 처음에 "대학지도(大學之道)는 재명명덕(在明明德)하며 재친민(在親(新)民)하며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이나라"했지요. 그것을 우리말로 번역하시는데, 선생님의 특색이 거기있는데, 아마 그 점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일 거요. 내가 보는 걸로는 독특한 생각을 하시는 데는 선생님이 제일이신데 더구나 그걸 우리말로 하는 데 놀라운 게 있어요. 그런데 그 풀이를 하셨어요.
"한 배움 길은 밝은 속알 밝히는데 있으며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데 머무는 데 있느니라"라고 하셨어요. 친민(親民)은 신민(新民)이라고도 하는데 주자(朱子)는 신민(新民)이라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그랬고, 다른 사람들은 본래 씌어 있는 친자(親字)로 하는 것이 그대로 좋을 거다 했어요. 선생님도 어느 편이냐 하면 친민 편이어서 그것이 더 좋을 거라고 하시며 "씨알 어뵘에 있으며"하셨어요. 씨 은 민자를 말하는 것이고 '어'는 어버이라고 하는 친자에 어버이에게 뵌다는 뜻에서 어뵘이라고 그랬는데 그때 '씨알'소리가 처음으로 나왔어. 민자에 대한 우리말은 뭐라고 하겠느냐? 우리말에 없지요. "씨알이라고 그러면 좋지않아?" 그런 말로 가볍게 말씀하셨는데, 거기에 대한 무슨 풀이는 별로 안하시고 그랬는데, 그 말씀이 좋아서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가 잡지 내게 되면서 제목을 뭐라고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제 씨 이란 소리를 그대로 쓰기로 했지요. 잡지 제목으로 붙일 때 좀 생각을 여러 가지로 하다가 내가 가장 내세우고 싶은 것은 민중이며 그것을 제목에 넣어서 하고 싶은데 민중이라기 보다는 '씨알'이라는 이 말이 좋을 거다 하는 생각에 그렇게 했지요.
그전에 '사상계'에 쓸 때에도 민중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한문자로 민중이라 그러는 것보다는 선생님이 해주셨던 그 말 그대로 쓰는게 좋을 거다, 그렇게 썼지요. 내가 생각하는 거는 그저 우리말에 '씨'란 말, '알'이란 말을 한데 붙여서 '씨알'이라 그랬느데 참 좋은 것 같다. 그대로 이날까지 쓰게 된 거지요.>(전집 14:357-8)

이제는 '씨알'하면 함 선생님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선생님은 아호(雅號)같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지만 때로는 당신을 '바보새'또는 한자로 '信天翁'이라고 부르시기도 했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아호로 '씨알'을 연상할 정도로 선생님과 씨알은 이신동체와 같이 되어 버렸다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씨알은 전체요 또 부분이다. 하나님 내 안에 있고 나는 하나님 안에 있다지만 그저 큰 알 속에 작은 알이 있고 작은 알 속에 큰 알이 있는 것이니라.
아니다. 크고 작음이 없느니라. 그저 알일 따름이다.
앞에는 안이 밖에 있고 밖이 안에 있다. 밖의 밖이 안이요, 안의 안이 밖이다.
전체, 밖을 그리면 ○이요, 하나, 속을 그리면 ·이다.>(전집 14:341)

선생님이 '씨알의 소리'창간호 (1974년 4월호)에 쓰신 '씨알의 울음'이라는 장시(長詩)의 한 부분이다. 이상의 두 가지 인용문에서 독자들께서는 '씨알'이라는 말의 유래와 '씨알 '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철학을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런데 과학자인 나로서는 이 장시 중에 <과학의 시대는 씨알의 시대, 씨 의 아구를 트이어 눈을 트고 입을 열게 한 것은 참의 과학이었다. 씨알은 과학으로 말한다.>라는 구절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의 과학관에서 오늘의 과학철학의 편모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젊은 분들은 이런 생각 안하겠지만 80을 바라보는 나 같은 늙은이들은 아무래도 6·25 파난으로 복작거렸던 부산의 아우성 속에서 '사상계'지가 고고성을 울렸고('사상계'의 창간호가 1953년 4월호) '씨알의 소리'지의 창간호가 1960년 4월 19일 소위 학생혁명이라 할 수 있는 4·19 학생운동 10주년을 기리며 발행됐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부산 서대신동 판자집 교사에서 대학 졸업장을 받은 20대 중반인 젊은이의 지적 갈증을 채워준 샘물이 바로 '사상계'였다고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업다. 그래서 나는 나의 미국 유학시절, 한달도 거르지 않고 나에게 '사상계'지를 부쳐준 이제는 다 같이 늙어가고 있지만 당시의 천안여고에서 가르친 여학생 박동란과 심재숙의 이름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불혹을 넘어선 장년기의 대학교수로서 혹독한 군사정권의 독재아래서 숨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독자라기 보다는 편집위원으로서 또는 필자로서 그리고 급기야는 발행인으로서 이바지 할 수 있었던 '씨알의 소리'지가 어쩌면 나의 삶의 방향을 틀어 놓았다고 말해서 지나침이 없을 것 같다. 그 '씨알의 소리'지를 맨주먹으로 나이 70에 창간하면서 "나는 왜 이 잡지를 내나?"라는 말하자면 <창간사>에서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다.

<군사정권에서 제일차 공화당 집권으로, 거기서 제이차 집권으로, 또 거기서 삼선개헌파동으로 나감에 따라 민주주의는 전락의 기로만 줄달음쳤습니다. 국민의 정신은 점점 더 떨어졌습니다. 전에는 겁쟁이라고나 했겠지만 이제는 겁쟁이 정도가 아니라 얼빠진 놈입니다. 그럴수록 기대되는 것은 지식인인데 그 지식인들이 온통 뼈가 빠졌습니다. 이상합니다. 학문이란 다 서양서 배운 것이라는데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양 역사라면 민권투쟁의 역사요 서양의 정치라면 권위주의에서 자유주의로 달리는 정치인데 어째서 배운 것을 하나도 실천하지 않을까? 시저 죽는 것을 배웠으면 오늘의 시저도 죽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프랑스 혁명사를 읽었으면 민중의 앞장을 서야 할 것 아닙니까? 소크라테스, 예수의 수난을 보았으면 그와 같이 죽어도 옳은 건 옳다 그런 건 긇다 말을 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저들은 하려하지 않았습니다. 학원에 기관총 최루탄이 들어와도 모른체하고 친구가 바른말 하다가 정치교수로 몰려 쫓겨나도 못본 척하고 있었습니다. 귤이 제주도에서 바다를 건너오면 기실(枳實)이 돼버리고 만다고, 서양자유의 학문도 종교도 이 나라에 들어오면 변질하는 것입니까? 그 풍토가 나쁩니다. 그렇습니다. 그 풍토를 고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끼리 서로 씨  속에 깊이 파고 들어야만 합니다. 내가 몇 해 전에 사상의 게릴라전을 해야 된다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정규군이 아무리 크고 강해도 유격대는 못 당합니다…사상의 유격전은 더욱 필요합니다.…마비된 양심에 위로와 희망을 주어 불러 일으켜야 합니다….
이제 내가 이 잡지를 내는 목적을 말합니다.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한 사람이 죽는 일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한다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말 중에 가장 강한 말은 피로 하는 말입니다….
둘째는 거기 따라오는 것인데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유기적인 하나의 공동체가 생겨야 한다는 것입니다…자발적인 양심의 명령에 의해 성립되는 공동체는 되기만 하면 놀랍게 활동합니다…씨 의 소리를 해보자는 것은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씨알의 소리'의 시대는 그 고고성을 울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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