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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양적 교양서…한국판 바켈로레아의 "놀라운 답변"
비교양적 교양서…한국판 바켈로레아의 "놀라운 답변"
  • 강유원 동국대
  • 승인 2003.12.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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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의 讀書有感 : 한국의 교양을 읽는다

▲ © 교보문고
사람들은 '교양'이 고정된 실체적 내용이나 되는 것처럼 말한다. 보편적인 게 몇 가지 있고, 여러 상황에 따라 서너 가지를 그에 덧붙이면 교양의 내용이 완성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있기에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는 부제를 가진 책도 만들어진다.

교양을 이렇게 규정하면 교양을 쌓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각 분야별로 기본적인 걸 조금 익힌 다음, 약간 확장된 지식을 그에 덧붙이고, 시사상식과 매너 있는 태도, 그리고 조리 있는 말솜씨를 곁들이면 얼마든지 교양인으로 행세할 수 있을 것이며, 여기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전문직업까지 가지고 있다면 금상첨화겠다.

교양을 이처럼 고정된 그 무엇으로 파악하는 것, 즉 교양을 物化하는 것은 교양 없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교양은 오히려 끊임없이 스스로를 계발해가는 과정 그 자체라 해야 옳다. 교양을 구성한다고 여겨지는 지식을 쌓는 건 물론이고, 그걸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나아가 지속적인 자기 반성을 거듭하는 것만이 陶冶로서의 교양의 참된 의의라 할 것이요, 이는 교양을 앎과 삶의 일치로 파악하는 것이다.

앎과 삶의 일치는 간단치 않다. 사회적 맥락과는 무관한 수학적 지식이라면 모를까, 세상의 대부분의 앎은 앎 그 자체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으며, 삶 역시 독자적인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교양은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진리로 간주되는 앎을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려는 태도를 가리킨다고 해야 할 것이다. 책 한 권 읽는다고 교양이 쌓이지 않으며, 교양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니다.

‘한국의 교양을 읽는다’는 감히 책 제목에 '교양'을 붙여 놓았지만, 이 책 한 권이 앞서 말한 교양을 가져다준다고 자부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렇게 인정해주는 이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교양의 바탕이 되는, 또는 최초의 출발점이 되는 독서와 사색의 주제들에 대한 소개에 지나지 않으며, 그 점은 책을 만든 이들이나 기고한 필자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교양에 관한 책을 만들고 글을 쓸 만큼 교양인이라면 말이다.

이 책은 사실 그리 새롭지 않다. 이런 부류의 책은 이미 같은 출판사에서 프랑스 바칼로레아 논술고사의 질문과 답변을 묶은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이미 출간된 책의 한국어 버전이라 보는 게 가장 정확하다. 유사하게 43개의 주제를 제시하고 그 주제들에 대한 답변을 내놓고 있다. 간단히 말해 논술 시험 문제 예상 답안지처럼 구성돼있다. 좋게 보자면 좋은 책이다.

이 책에서는 몇 가지 비교양적인 측면들이 발견된다. 우선 바칼로레아 논술고사의 문제 제기 방식을 베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동네가 다르다는 말이다. 프랑스 바칼로레아는 오랜 세월에 걸쳐 시행됐고, 시험이 치러지는 날 대중들이 그 논제를 놓고 여기저기서 토론을 벌일 만큼 대중화돼 있다. 그러므로 수험서도 대중적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 정답이 두 개니 한 개니 가지고 야단법석을 떨 뿐이다. 그러니 이런 종류의 책을 대중이 받아들이는 건 그리 쉽지 않을 뿐더러, 출간 시기까지 烏飛梨落으로 맞아 떨어지면(이 책은 12월 8일에 출간되었다) 대학 논술고사용 도서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의심을 거두어내자면 출판사에서는 일정한 간격으로 상세한 주제를 다룬 책을 꾸준히 내어서 교양 총서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책에서 선정한 주제들이 과연 “보통의 독자들과 연대”를 맺기에 합당한지 의심해볼 수 있다. 한국의 보통 독자들은 이렇게 고상한 문제들을 고민하며 살고 있지 않다. 그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이 진정한 대중 교양서가 되려면 적어도 그들의 삶에서 길어 올려진 사례들을 논의의 단초로 삼았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제시된 대부분의 “놀라운 답변들”은 그 주제에 관한 학적 논의를 양시론적으로 정리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이 책에 기고함으로써 이른바 교양인으로 간주되는 필자들의 교양 수준을 짐작케 하는 지표가 될 수도 있다. 놀라운 점은 오히려 그것인 것이다.

강유원 / 동국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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