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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만들어질 뿐"
"천재는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만들어질 뿐"
  • 이경덕 연세대
  • 승인 2003.12.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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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생산의 사회사』(이현석 지음, 경성대출판부 刊)

▲ © yes24
작가의 존재는 문학(작품)이라는 개념, 그리고 그것에 기초한 문학제도의 존재와 분리될 수 없다. 그 제도가 형성되는 역사를 더듬어보는 일은 그 제도 바깥에서 그 제도를 낯설게 바라보는 작업의 일환이다. 그러나 제도를 바깥에서 바라보는 일이 말처럼 쉽지는 않은데, 왜냐하면 연구자 자신이 속해있는 제도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개념과 제도를 바깥에서 바라보려는 시도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개념이나 현 제도 자체에 무엇인가 균열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구조주의 이후 점차 '텍스트'가 신비평적 의미에서의 완전하고 자족적인 '작품'을 대신하게 되는 한편 '작가의 죽음'이 선언되는가 하면(바르트) 작가라는 존재의 본질을 묻는 것처럼 보이는 '저자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이 사실은 담론에서 차지하는 저자의 '기능'에 관한 논술임이 드러나고(푸코), 알튀세르나 마셔레이의 영향하에 있던 맑스주의에서도, 레이먼드 윌리엄즈가 독창성이나 천재의 개념이 상당부분 낭만주의 시대에 확립된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탈신비화시킨 이래 테리 이글턴 또한 영문학 내지 영문과라는 것이 생기게 된 사정이 상당부분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밝힌 바 있다. 이후 활발하게 벌어진 정전 논쟁이나 문학연구를 문화연구로 대체해야 한다는 논의들은 현재의 (결과야 어떻든) 문학제도들을 적극적으로 바꿔보려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출판제도의 상업적 형성 속의 작가 규명

'작가생산의 사회사'는 정전 중의 정전인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바로 그 '작품'이 돼 가는 과정을 셰익스피어가 작가로 만들어지는 과정과 함께 고찰하는 한편, 그 과정에는 당대 정치판의 사정과 극단들 사이의 경쟁, 검열, 출판권 및 저작권, 지적 소유권의 문제가 주요한 변수였음을 재기발랄한 서술로 보여준다. 사실 이 책의 만만찮은 부피와 각주의 촘촘함에도 불구하고 질리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저자가 견지하고 있는 독특한 어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심각하고도 아우라 있는 개념이나 존재가 사실은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이해관계의 산물임을 설파할 때의 통렬함과 유쾌함이 저변에 깔려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자의식도 함께 버무려져 상쾌한 거리감을 유지시켜 준다.

애초에 셰익스피어가 사후 40년 동안이나 묻혀 있다가 재등장하게 된 연유는 극장 허가 과정에서 불리했던 한 극단이 상연권의 논란조차 불러일으키지 않을 만큼 미미하게 여겨졌던 셰익스피어 극을 각색해 성공을 거둠에 따른 것이며, 또한 왕정복고기의 정치상황을 빗대어 다룰 수 있을 다양한 자료를 셰익스피어가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여기서 현대인들이라면 질색할 표절이며, 제멋대로의 각색이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질 수 있었던 것은 애초에 원작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어차피 모든 작품은 선대의 작품들을 모방하건, 자연을 직접 모방하건 '모방'이기 때문에 좀더 좋은 모방을 위해 작품을 고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법 속의 경제논리 시원스럽게 해명

이러한 작업이 '훼손'으로 비치게 된 것은 소유권과 관계가 있으며, 작품과 관련된 법적 자아, 혹은 서지적 자아의 형성과 관계가 있다. 말하자면 오늘날 그 역사적 정체가 드러나고 있는, 사회와 대립되는 개인주체, 개성, 독창성의 개념 혹은 이데올로기는 결국 당대의 물질적 하부구조에서 연원하는 것으로서 데니스나 영의 독창성 이론이 출판권 및 저작권과 관련해 형성된 것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각색부분이며 온갖 허접한 것들을 정리해 원본을 확정하려고 하는 (결국은 실패한) 노력이 그토록 후대에 이뤄지게 된 것도, 저작권 및 지적 소유권의 확정이라는 이해관계가 나중에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나중에 생겨난 개념의 잣대를 가지고 왕정복고기의 작품들을 비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수밖에 없어진다. 저자는 각색본들을 분석하면서 그 각색의 정치적 이유를 밝혀내고 있는데, 그러나 각색자의 의도가 그대로 관철되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 의도와 전략과 결과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우연의 요소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여튼 각색에 대한 죄의식 자체가 없었던 시대의 작품들을 각색했다는 이유만으로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즉 역사의식의 결여인 것이다. 블룸의 '영향의 불안' 같이 외견상 역사와 정신분석을 결합시켜놓은 것 같은 책도, 영향의 불안이라는 말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그에게 영향의 불안이 없었던 것은 그 앞에 대시인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모순된 발언을 하고 있다는 타당한 지적을 한다.

저자는 다른 한편 "과정의 재구성을 통한 묘사에 주력할 뿐 그 과정을 작동시키는 원인(들)에 대한 탐색이 부족한" 연구들을 비판하면서 자신은 그 원인을 제공한다는 면에서 다른 연구자들과 차별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푸코의 강력한 영향 아래에 있는 신역사주의 연구들은 과거와 현재의 차이 내지 단절을 강조하는 정도의 역사의식은 발휘하되, 그 차이를 낳는 '무엇'에 대한 사유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인과성에 대한 사유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인과성 확정에 대한 불안감에서 나아가 (애초에 확정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과성 자체도 구성되는 것, 혹은 그 자체가 담론 내지 텍스트임을 강조하곤 한다.

이제 저자는 그 '원인'을 정치적인 것, 법적인 제도 속에 반영된 경제적인 것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과정에 대한 인과적 '설명'을 시도하고 있는 셈이며 그 '설명'을 들은 나 같은 독자는 가슴이 시원해지고 또 재미를 느끼게 된다.

냉소적인 '상품화' 시각은 거슬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인과관계의 해명이 다분히 (사후설명에 능한) 저자의 도저한 상상력에 기인한 것이리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정치적인 것'이 '우연한' 정치적 사건, 법령, 검열 등의 영역으로 다소 협소해진 탓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작가는 창조적 천재성의 소유자이고 그의 작품은 그 남다른 천재성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므로 물질적 재산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재산이라는 것이 서적상들의 주요 논거였다"라는 구절을 보면 생산이론에 특유한 여러 겹의 탈신비화가 일어나는데, 작품은 재산(상품)이고, 천재성의 구현은 그 상품가치의 보증서쯤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사실 상품화가 심화되고 진전돼, 인간의 머릿속 내지 무의식까지 상품화됐으며, 아무리 천재라 해도 팔리지 않으면 대접을 못 받는 오늘날의 (포스트모던적) 현실을 투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은연중에 사용가치란 애초에 없다라고 하는 (가치는 언제나 교환가치였다는) 냉소적이며 포스트맑시스트적인 명제를 승인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필자는 연세대에서 'Fredric Jameson의 역사주의적 상상력'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맑스주의적 영미비평이론과 관련해 많은 논문을 발표했으며, 저서로는 '탈식민주의: 이론과 쟁점' 등이 있고, 역서로는 '문학비평:반영이론과 생산이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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