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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안 지지든 반대든 ‘공교육’ 이념 문제 삼지 않아
개혁안 지지든 반대든 ‘공교육’ 이념 문제 삼지 않아
  • 김유석 프랑스 통신원
  • 승인 2003.12.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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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 프랑스 대학교육개혁 논쟁

프랑스 대학가는 10월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여름내 수그러들었던 대학제도개혁 문제로 다시 한번 술렁이고 있다. 한국의 한총련에 해당하는 프랑스 전국 학생조합(UNEF)은 11월을 기점으로 전국적인 교육개혁 반대 시위와 휴업을 조직하기 시작했으며, 한동안 잠잠했던 대학개혁을 둘러싼 토론도 다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교육재정문제 해소와 대학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추진되고 있는 프랑스 대학개혁법안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대학 정책의 권한을 국가로부터 지역자치단체로 분산시키는 ‘탈중심화 정책’, 또한 교육 예산 집행권을 각 대학 당국에 맡기고 산학 협동을 허용하는 자율화 정책, 그리고 유럽의 다른 대학들과의 자유로운 학생 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유럽 공동학위제와 그에 따른 학제 개편이 그것이다.


사실 교육의 탈 중심화 정책과 대학 자율화 정책을 둘러싼 논쟁의 경우, 지지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 차이가 비교적 분명하게 부각된다. 개혁안을 지지하는 측은 새로운 제도가 다른 국가들, 특히 미국의 대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체돼 있는 프랑스 대학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대안이라고 본다. 대학에 더 많은 자유와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대학의 능동성 및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반대하는 측은 대학에 더 많은 자율성을 보장한다는 말이 사실은 대학의 사기업화를 조장하는 것일 뿐이며, 이는 본질적으로 국가가 부담해야 할 공교육의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라고 비난한다. 오히려 이를 통해 대학들 간의 경쟁으로 말미암은 불균등한 발전, 아울러 지역 및 사회 계층에 따른 교육 불평등이 초래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논쟁은 지난 수백 년간 프랑스에 강하게 뿌리내려온 공교육 이념이라는 틀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개혁안을 지지하는 사람이건 반대하는 사람이건 누구도 감히 공교육의 이념을 문제삼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론은 새로운 법안이 이 이념과 상충되느냐 아니냐를 놓고 진행되는 셈이다.

정작 복잡한 문제는 유럽 공동학위제의 도입과 그에 따른 학제 개편을 둘러싸고 나타난다. 프랑스에서 유럽 공동학위제는 'LMD체제'로 불린다. 'LMD'체제란 학사 3년(LICENCE), 석사 2년(MASTERE), 박사 3년(DOCTORAT)의 교육체제를 부르는 말이다. LMD체제의 도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체제를 통해서 유럽 학생들이 자유롭게 원하는 나라의 대학에서 원하는 학문을 연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새로운 학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LMD체제가 정작 학생들의 학업능력 향상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뿐더러, 실제로는 대학 자율화의 일환으로 제시된, 마치 기업의 구조조정과 같은 것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 논쟁의 이면에는 훨씬 미묘한 문제가 가려져 있다. 사실 유럽 공동학위제 구상은 현 집권세력인 라파랭 정부와 페리 교육부장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1997년 좌파 사회당 정권 때부터 이루어졌으며, 당시 교육부 장관이었던 클로드 알레그르가 입안해낸 것이다.

알레그르 전 교육부 장관은 지난 11월 25일 '리베라시옹'지와의 인터뷰에서 유럽 공동학위제 구상과 관련, “학생들이 좀더 자유롭게 유럽을 왕래하고, 원하는 학문을 원하는 곳에서 탐구하도록 보장하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LMD체제의 근본 이념은 다양한 학문적 관심들의 '조화'에 있는 것이지 학제의 '획일화'가 아니라고 역설했다. 그렇지만, 그 역시 현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대학 자율화와 탈 중심화 정책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명했다.

반면 야시르 피슈탈리 전국학생조합 의장은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공동 학위제 자체가 아니라, 이 제도가 담고 있는 내용이다.'라고 주장했다. 공동학위제가 국가의 공교육 이념을 파괴할 소지가 충분한 교육 개혁안의 일환으로 제시됐다는 점에서 이들은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분위기다.

요컨대 역설적인 점은 좌파정권에 의해 구상됐던 유럽 공동학위제가 우파 정권이 구상하는 교육개혁안의 한 부분으로서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이 역설이 문제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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