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이 어렵다. 특히 서평을 통해 한 건 올리기가 어렵다. 학계가 손바닥처럼 빤하니 어찌 비평이 나오겠냐고 하지만 요즘은 논쟁에 나서는 학자들이 꽤 늘었다.
뛰어난 전문가 서평도 종종 나온다. 그런데 기자가 확실히 한 건 올리기 위해선 여기에 머물 수 없다. 제대로 된 반론이 들어와야 한 건이다. 요즘엔 학계가 발전해서 반론청탁 수락비율이 높아졌다.
논쟁이 어그러지는 건 이 반론에서다. 필자가 원고를 보내오면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며 "그래, 한 구절 나왔다, 한 구절만 더 나와라"고 외친다. 서로 두 번은 오가려면 상대방이 대답할 수 있게 새로운 논점이 반드시 제시돼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쟁을 위한 학계의 노력은 여기서 멈춘다. 자기 변호의 철옹성으로 다듬어진 글은 보는 이를 망연자실케 할 뿐이다.
오늘날 학계를 떠도는 유령은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아닐까. 이제 남들 눈치를 덜 보고, 소신껏 비판하는 것까진 되는데 답변이 너무나 자기입장에 매몰돼 있어 말걸기의 방식이라 보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이런 글들은 개념에 대한 상호간 차이를 따져보는 데 지면의 반 바닥을 쓴다. 미비했던 논거를 보충하는 데 다시 반 바닥을 써서 글을 만든다. 그럴수록 글은 점점 암호로 바뀌어가고, 해당 주제의 생명력은 희미해진다. 글의 시작엔 논평을 해줘서 고맙다며 의례적인 목례를 하다가 갑자기 돌변해서 몰아붙이는 전형적 태도는 정말 아쉽다.
이는 비판에 일대일 반격을 가하는 식으로 글을 쓰는 탓이다. 답변자의 도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괜히 오지랖을 넓혔다가 밑천이 달릴 수 있으니, 이미 터진 둑만 성심껏 메꾸자는 소심한 태도의 발로임이 분명하다.
성공적인 논쟁을 위한 '그물코'라 할 수 있는 반론의 美德은 그 전형성의 어색함을 깨는 데서 생겨나지 않을까. 복잡하게 장막을 둘러치지 말고, 해당 주제의 공공성과 생명성을 살려나가는 생산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