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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김광현 교수의 서평(294호)에 답한다
반론: 김광현 교수의 서평(294호)에 답한다
  • 박상진 부산외대
  • 승인 2003.1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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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림의 속성에 대한 오해...실망보다는 비판적 수용이 우선돼야

‘에코 기호학 비판’을 내면서 나는 에코에 대한 실망을 마감하고 나의 희망을 살려나갈 준비를 갖추고자 했다. 이론가로서 에코는 그렇게 “엉망”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아주 세련된 이론 체계를 만들었다. 체계에 대한 욕망,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학자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에코는 바로 세련된 기호학 이론 체계를 구축하면서 그 안에 자신의 아이디어였던 열림을 가두고 배반했다. 하긴 열림을 배반했다는 것이 “그토록 큰 문제”는 아닐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어쩌면 호들갑을 떠는 이유는 배반이나 기호학 체계보다는 열림이라는 아이디어 자체의 무게 때문이다. 그 열림을 나는 에코의 기호학과는 다르게 발전시키고 싶은 것이다.

“미완성 이론”에 대한 비판이라는 말은 좀 이해하기 힘들다. 에코가 세운 “미완성의 열림 이론”이란 원래부터 없다. 다만 완성된 그의 기호학이 있을 뿐이다. 그 자기완결성이 지나쳐서 열림을 담아내지 못한 것이다. 에코의 기호학은 체계의 완결성과 법칙을 목표로 삼지만, 열림의 이론은 이론의 미결정성에서 나온다. 완성과 결정을 끝없이 보류하는 과정, 그것이 열림의 이론의 속성이다.

내가 “미완성의 이론”을 “잔인”하게 짓밟아버린 것은 에코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하며, 그래서 에코를 평가하는 올바른 길을 걷지 못했다는 것으로 들린다. 실망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이 “학문적인 것”에서 벗어난 것인 듯이, 나의 연구의 모티브이거나 중대한 추진제로 보는 듯한 발언은 잘못된 것이다. 에코의 기호학을 비판하고 평가하려면 기호학의 세계 내에서 해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은 분명 옳고 앞으로의 과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작업이다.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니다. 거기에 흥미도 없다. 나는 열림을 온전히 가져오고 싶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코 기호학은 그저 넘어설 허들로 자리했고, 그래서 부제를 “열림의 이론을 향하여”라고 제시한 것이다. 

에코를 해석하는 한계는 에코에게 있지 않다. 비판의 대상이 살아있다는 것이 걱정되고 두렵고 미안하기도 하지만, 에코 자신의 반응을 볼 수 있는 것은 퍽 고무적인 일이다. 정작 에코는 자신의 이론적 여정에 단절이 있을 수 있고 그런 비판도 필요하지 않느냐는 여유를 보였다. 아마 그런 여유는, 그래도 해석의 한계는 있기 때문에 내가 지나친 해체를 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데서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했다. 문제는 에코가 공개적으로 반응해주었으면 하는 것인데, 마침 그런 기회가 생겼다. 영국에서 출판될 에코 연구서(‘Illuminating Eco: In the Boundaries of Interpretation’, Ashgate)에 한 꼭지를 썼다. 에코가 그 책에 실린 꼭지들에 의견을 적어 맨 마지막에 한 장을 실었다고 들었다. 그 내용이 궁금하다.

실제로 ‘Illuminating Eco’에 기고한 사람들은 에코의 이론 작업의 내적 단절, 바티모, 데리다, 해체, 공동체의 합의, 그리고 현실성 따위를 거론한다. 그 전체 맥락은, 해석의 어떤 한계는 있으며 그것을 받쳐주는 것은 공동체의 합의 따위라는 에코의 주장에 관련돼있다. 에코는 늘 “찾아야 할 뭔가”가 여전히 있으며 그 찾는 일은 우리의 임무라고 말한다. 그러나 찾아야 할 보편과 논리, 총체성은 없다. 에코에 대해 비판적인 혹은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은 시작되고 있다. 찬사 식의 연구는 큰 논점이 안된다. 이미 에코가 말끔하게 정리했고 계속 변호해온 내용에 무슨 말을 더할 수 있겠는가. 나는 실망과 낙담에서 비판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정당한 학문적 비판을 가한 것이다.

“파괴적인 열림은 열림의 원리를 수장하게 만든다”는 지적에 동감한다. 그것은 열림의 무책임한 상대주의적 표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이론으로 발전시키려는 열림은 아니다. 나는 지금 ‘열림의 이론과 실제’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 이 책도 역시 열림의 그 어려운 이론화에 성공했다기보다는 계속 문제로 삼는 과정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과정 자체가 열림의 실천이기도 하다.

에코의 기호학에 관련된 나의 주장이 입증되거나 적어도 문제로 제기돼 에코의 탈신비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에코 기호학 비판’이 "엄청난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면 좋겠다. 이 책이 그만한 품질을 갖춰서라기보다는 좀 어설프더라도 서양 이론의 비판적 수용이 우리에게 더 필요하리라는 생각에서다.

몇 가지 지적해둘 것이 있다. 에코의 열림은 “원리”라기보다는 아이디어였고 ‘시학’의 연구였으며 예술을 이해하는 방식에 한정된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비판”하지 않고 정리했다. “열림의 문제가 에코의 이론 한 구석을 늘 차지했다는 것”은 다시 새겨들을 얘기다. 에코의 이론서에서 열림에 대한 언급은 면면히 이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슬로건이고 강박이며 향수였던 것 같다. 아니면 한 구석에 처박힌, 이따금씩 꺼내보는 기념품이거나. 그렇게 열림을 견지하기보다는 그 이론화에 치중한 것이 에코의 이론가로서의 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론은 실천과 유리되지 않으며, 언제나 실천의 힘을 내재해야 한다. 에코는 이론은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질서를 부여하는 일의 둔감한 총체화의 오류를 지적하고, 차라리 무질서의 흐름을 받쳐주는 이론을 상상한다. 그것이 열림의 이론이다.

박상진 부산외국어대/이탈리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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