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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60)]철도 직선화의 폭력
[정세근 교수의 ‘철학자의 가벼움’(60)]철도 직선화의 폭력
  • 교수신문
  • 승인 2020.05.26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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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유감

철도 직선화로 인해 도심 기차역 사라져
직선은 현대화이고, 현대화는 자본주의화

이제는 현대인들도 느림을 안다. 넓은 것도 좋지만 좁은 것도 좋아지고, 빠른 것도 좋지만 느린 것도 좋아진다. 넓고 빠른 것은 속도전이지만 좁고 느린 것은 예술행위이기 때문이다. 

현대화는 직선으로부터 오지만 인간성 회복은 곡선으로부터 온다. 말도 부드럽게 돌리고, 마음도 한숨 돌리고, 길도 한 번쯤 돌려야 한다. 에둘러가야 예술이고 문학이다. 돌아가지 않으면 명령어이고 판결문이다. 하다못해 잠시 쉬어가야 미적이다. 최고의 베스트셀러 제목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아니었는가. 시에서도 ‘올라갈 때 못 본 꽃, 내려올 때 보았다’고 말하지 않는가. 

북경 올림픽 때 다 없애버리려고 했던 정말 작은 골목들도 이제는 ‘후통’(胡同)으로 관광 상품이 되었다. 작은 골목 안에 또 작은 골목이 있고 그 안에 막다른 작은 골목이 또 있다. 일반적으로는 작은 골목만 보지만 좀 더 들어가 보면 정말 놀랍다. 오직 누울 공간과 책상 하나뿐인 1, 2인 가구가 이어져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말로 사회문제를 주제화하지만, 서울의 골목들은 이미 관광 상품이 되었다. 인사동 먹자골목은 전형적인 곳이었고, 북촌과 서촌 그리고 익선동이 그 뒤를 따른다. 중국에서도 젠트리피케이션을 신사화(紳士化)라는 직역으로 그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도시인들이 좁은 골목에서 공연히 똥 폼 잡고 커피 한 잔하려 드니 본래 거주민이 쫓겨나고 만다는 뜻이다. 신사는 '장자'에 나오는 멋쟁이 ‘진신’(縉紳) 선생에서 나온 말이다. 

이렇게 보면 예전의 직선화와 고속화를 지금까지도 유지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촌스러운 것이 된다. 정답은 직선화와 고속화만큼이나 곡선화와 저속화도 지켜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니까 쾌속이 아니라 완행(緩行)도 좋고, 일직선보다 완만(緩慢)한 곡선이 멋있다는 이야기다. 

과거 현대화 초입에서 벌어졌던 대한민국 도로의 직선화는 이해가 간다. 느려터진 조상님들의 나태와 거만에 휩싸인 유산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속도가 어진 사람을 죽이고 인정 많은 마을을 없애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최근에 옛 새마을 열차인 ITX 기차역을 청량리로 모은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아직도 통합적 관리로 대표되는 중앙집권적 사고가 설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유럽의 기차가 앞뒤 의자 반반으로 되어있는 까닭은 역에 들어가면서 앞뒤가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터미널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타고 내리고 반대 방향으로 떠난다. 딴 터미널에 들어가면 다시 반대 방향이 된다. 앞뒤에 기관차가 있고, 정차 때마다 움직이는 방향이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유럽의 도심에는 컴퓨터의 터미널처럼 막다른 기차역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철도 직선화라는 명분 아래 도심의 기차역을 다 없애버려 기차를 시민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여기서 음모설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 때문에 시내도 공동화되었다. 나의 청주만 하더라도 그렇다. 도심의 청주역에서 교외의 청주역으로 옮기고, 이제는 사람들이 외면해버린 외곽의 청주역이 되고 말았다. 

교통시설을 꼭 집중할 필요는 없다. 시내에서 가기 불편해도 파리 북역(Gare du Nord)은 국철(SNCF)의 중심 역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그렇듯 효용과 집약이라는 논리로 무엇이던지 하나로 묶는 것은 중앙집권의 망상에 가깝다. 중앙(Central)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직선의 폭력을 모르는가? 직선은 현대화이고, 현대화는 자본주의화이고, 자본주의화는 돈 앞에서 예속과 굴종의 삶을 선택해야 하는 것인 줄 모르는가?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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