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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를로퐁티 현상학과 예술세계
메를로퐁티 현상학과 예술세계
  • 교수신문
  • 승인 2020.05.26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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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메를로 퐁티
모리스 메를로 퐁티

지난 세기, 후설과 하이데거의 철학적 유산을 왕성하고 날카로이 섭렵한 프랑스 현상학자들 중에서도 메를로퐁티의 시각은 독보적이라 하겠다. 이는 그가 예술을 사고하기 위해 마련한 특별한 수용구조 때문인데 그것은 예술의 두 측면으로서, 하나는 창작에 고유한 ‘주관적 태도’로서 「표현성」이요, 다른 하나는 세계의 ‘객관적 수정’이자 창작의 결과물인 「작품」이다. 세계의 한 형태로서 예술품은 세계 가운데로 깊숙이 개입된 주관성이 활동한 결과인데, 이때 세계란 인간을 자신의 온전한 부분으로 삼는 ‘존재의 피륙’(tissu)이라는 의미에서 살(chair)이다.

창작의 결과를 유도하는 살은 존재의 역동적인 리듬으로서 역사와 문화를 가로질러 심층적으로 예술작품을 변모시키게 된다. 즉 살의 흐름을 따라 화가의 눈길이 스쳐 지나간 후의 세계는 더 이상 동일한 세계가 아닌 것이기에 예술은 우리에게 세계를 보는 법을 거듭 가르친다고 하겠다. 이처럼 예술이 우리의 감수성과 사고력 그리고 우리의 세계관계를 교정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철저히 육화된 정신인 우리 몸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예술에 대한 이 같은 생각은 알랭과 폴 발레리 같은 사상가에게도 있었으나 메를로퐁티는 그들에게 견고한 철학적 토대를 제공하게 된다.

이 철학자의 예술에 대한 관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육화의 현상학’으로 의미가 분명해진 ‘세계’ 개념이 필요하다.

이는 미학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레비나스와 비교할 때 잘 나타난다. 레비나스의 ‘주체성’은 의미가 배제된 충만이자 순수현전으로서 존재인 ‘세계’와는 다른 존재방식을 원초적으로 드러낸다. 고로 그의 주체성은 익명의 존재인 “Il y a”로서의 세계보다 일의적이다. 나아가 ‘의미 부재의 충만’인 이 세계를 사르트르 역시 인간에게 무의미라는 구토를 일으키는 ‘우연성’으로 부른다.

하지만 세계에 대해 부정적인 이 두 철학자와는 반대로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에서는 익명의 세계로서 존재(Etre)의 지각경험에 비해 주관성이란 이차적 경험에 불과하다. 즉 우리는 의식이 만든 거리로 말미암아 부분적으로는 세계에 낯선 채, 우리 고유의 신체-존재를 통해 언제나 이미 심층에서부터 세계와 조율되고 있다. 우리는 느끼면서도 느껴지고 보면서도 보이는 ‘세계의 부분’인 동시에 세계는 우리를 가르치고 유혹하며 이윽고 우리를 의미로 열어준다.

그 결과, 화가는 ‘익명의 바탕’ 위에서 ‘개성적인 무엇’을 자신에게 이야기해줄 이 세계에게 그 자신의 고유한 감수성의 신비를 돌려주려고 한다. 다른 모든 이들도 민감해할 ‘개성적 그 무엇’의 발원지인 세계로 말이다.

그러므로 메를로퐁티의 ‘세계’는 레비나스와 사르트르가 낯선 존재 “일 리 아”로 기술한 흉측스러움이 아니다. 전자에게 본래적인 것은 모든 사유 이전의 ‘세계의 익명성’이요, 그 결과 주체는 후위로 밀려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각성의 불가사의한 현전인 익명성을 우리 안에 지니기 때문이다. 감각성의 이 내적 현전이야말로 예술가를 창작으로 몰아가며, 외부로 펼쳐진 작품을 통해 우리 자신도 감각적이 되게 한다. 그래서 메를로퐁티의 철학에서 회화는 세잔 및 클레의 작품을 통해 특별한 지위를 누린다.

그에게 세잔은 세계로 육화된 실존적 관계의 진리를 탐색하는 상징적 존재이다. 화가란 저 높은 곳의 창조주가 아니라 자신 안에 “능산적 자연”이 활동하도록 스피노자를 놓아두는 매개자이기 때문이다. 능산적 자연은 모든 군주적 활동과 모든 반성적 작용에 앞서는 익명의 세계로서, 화가 자신도 일부분을 이루는 ‘살아있는 살’ 곧 역동적인 ‘존재의 리듬’이라 하겠다. 그래서일까, “풍경은 내 안에서 그 스스로를 사고하며 따라서 나는 이 풍경의 의식이 된다.” 그림은 이처럼 “지각된 세계의 암시적 논리”를 작동시킨다. 부연하면 지각세계의 논리란 가시적인 동시에 비가시적인 것 사이의 변증법적 게임이 되는데, 불분명한 기미(幾微)와 더불어 타자로 잠식(蠶食)되면서 존재가 열개(裂開)하듯, 세계가 자신 안에서 그 스스로를 구성해가는 놀이라 하겠다. 요컨대, 느끼면서 느껴지고 보면서 보이는 지각적 신체를 통해 세계의 온전한 부분이 된 우리와 상관 중인 이 세계야말로 ‘보편화된 암시’ 자체이다. 그 결과 “육화된 실존의 의사(疑似) 영원성과 뒤섞이는 예술의 의사(pseudo) 영원성”이 표출된다.

클레 역시, 태고 이래로 “사물들이 흥분되면서도 비밀스레 발생”되고 있는 가운데 지금 막 “태어나고 있는 듯한 상태”로 자연을 복원한 화가다. 이 같은 현상의 예리한 증인 메를로퐁티는 언제나 천연의 날것, 국지적 특유, 암시적 어법, 완연한 낯섦이 표현되도록 하는 ‘유아적 자유분방’에 매료된다. 게다가 이 천진난만한 “원초적 표현양식”들이 응축된 방법으로, 아프리오리가 부재하여 생경하고도 직접적인 진리 곧 객관화 이전의 본래적 진리가 출현케 만드는 ‘시적인 창조’로도 이끌린다.

고로 색채와 마찬가지로 클레의 윤곽선은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은 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오버랩 되게 하고, 또 신체와 정신 사이의 음양적인 교환(chiasme)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메를로퐁티의 “근원 반성”의 이념에서 그 감각적 등가물이 솟구치게도 한다. ‘근원 반성’이란 인식론적 반성이 아니라 신체와 세계의 상호귀속(Ineinander)을 사유하는 존재론적인 반성이다. 여기서 살의 고고학(arch?ologie charnelle)은 탄생한다. 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양의(兩儀) 존재론을 통해 “세계의 살”이 늘 찰나적이고 미완성적인 관계들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 관계 항들 중 하나인 인간도 물론 한갓된 존재이다.

요컨대 ‘근원 반성’이란 철학의 궁극적 문제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성찰로 이해되겠으며 이로써 메를로퐁티의 예술은 철학적 요구의 종착지인 ‘육화된 정신’의 삶이라는 계약의 당사자가 된다.  

이런 맥락은 시인 프란시스 퐁주와 폴 발레리의 작품처럼 언어가 사물들의 생명력을 증폭시키기까지 ‘파롤’이라는 원초적 몸짓으로 복귀 중인 시(詩)에도 해당된다. 더불어 세잔의 그림처럼 누보로망(nouveau roman)도 ‘랑그’라는 제도적 언어 안에서 독자를 당황케 하는 ‘일탈의 게임’을 통해 창조적으로 랑그를 위반하기 위해 이 랑그 안에 등록됨을 환기하자.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작가의 ‘스타일’이란 의미들이 창발(創發)하게끔 모종의 비전을 부여하는 “일관성 있는 왜곡”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듯 예술에서의 “표현”은 의미를 발생시키려는 ‘의지’와 의미들이 잠재되어있는 ‘세계’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하는데, 이 잠재된 의미들은 세계의 무한한 심층을 암시하면서 결국 이 의미들이 감각적인 것에 내재하고 있음을 가리키게 된다. 메를로퐁티 미학의 진면목은 여기에 있다.

그런고로 그는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이론적 관점에서 예술로 접근하고 있다. 먼저, 희랍철학자 플라톤에게 육체란 정신이 사고함을 방해하는 것이기에 감성적 신체와 연관되는 예술 또한 진리의 적이 되는 반면, 메를로퐁티에게 예술은 세계의 부분이 되는 신체의 철저한 상관자이다. 다음, 세계의 자기-조형으로서 예술을 지향하는 메를로퐁티는 미셸 푸코처럼 예술과 세계 사이의 단절을 선언하는 질 들뢰즈의 반대편에 서있다. 이 후자의 눈에 지나치게 “유기적인 미학”인 메를로퐁티의 “살의 나르시시즘”이 비판받을 수도 있겠지만, 존재의 바탕인 “살의 두께” 속의 ‘간극’으로서 예술은 메를로퐁티의 양의변증법인 키아즘의 꽃이 된다. 아마도 후설의 “살아있는 현재”와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는 메를로퐁티의 예술 현상학에서 만개한 것으로 볼 수 있으리라.

신인섭 강남대 교수, 현상학회 회장
신인섭 강남대 교수, 현상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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